Magical Mystery Tour2014. 8. 25. 02:37


라오스에 시판돈(Si Pan Don)이란 이란 곳이 있다. 시판돈은 4천개의 섬이라는 뜻이고, 그 섬들 가운데 돈콩(Don Khong;콩섬), 돈뎃(Don Det;뎃섬) 등에 여행자들이 머문다. 나는 돈뎃에서 한 여흘 남짓 머물렀고 할 말이 참 많은 곳이지만 내 주변 사람들 중 거기 가서 좋아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아서 여행지로 추천할 마음은 없다. 


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곳에 놓고 온 물건 하나가 마음을 그곳으로 돌아가게 만들곤 한다. 


깜빠이라고 하는 청년이 매일 방갈로로 찾아와 잠깐씩 놀다 가곤 했었다. 자신의 고기잡이 배를 태우기 위한 목적이 있어보였지만, 바쁘고 부지런한 여행자가 머무는 곳이 아니어서 주민들이 장사속 없이 순박하기만 하다보니 깜빠이역시 자주 찾아와도 거부감을 주지는 않았다. 낮부터 온종일 맥주를 마시다가 오줌이 차면 방갈로 발코니 밖 메콩강을 향해 지퍼를 내리고 올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취해서 골아떨어지곤 했기 때문에 깜빠이가 놀러오면 배 타러 가자던 그에게 되려 맥주와 뱀부봉을 권하곤 했다. 그때마다 깜빠이는 시도를 해보면서도 술도 봉도 맛없어서 못하겠다던 그런 순박한 청년이었다. 여행이라기엔 그곳에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으면서도 그렇게 잠깐씩 찾아와 고기잡이 배 이야기를 하던 깜빠이 배역시도 일관성있게 한번도 타지 않았다. 

그 섬을 떠나던 날 섬을 나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깜빠이가 내게 와서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며 내밀었다. 그러면서 내게 뭔가 선물을 교환하자고 했다. 그림은 여자 그림이었다. 벗은 것 같기도 하고 입은 것 같기도한 이해하기 힘든 그림이었는데, 내용이 뭐가 됐든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림은 아니었고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더욱이 뭔가와 바꾸길 기대하고 있는 그에게 이미 짐을 다 싸놓은 상태에서 떠날 생각만 하던 도중에 줄만한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얼버무려서 거절하자 깜빠이는 그냥 그림을 내게 주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떠났다. 둘둘 만 종이 그림을 덩그러니 손에 들고 배낭을 짊어진 채 배를 타러 가면서, 꽤 오랜 시간 차를 여러번 갈아타야 하는 앞으로의 여정에 손에 든 깜빠이의 그림이 거추장스럽기만 했고, 결국 깜빠이가 없는 곳에서 한 상점 테이블 위에 그림을 놓고 섬을 나왔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걸 깜빡 잊은 것인냥 나는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걸리지 않았다.


내가 놓고온 깜빠이의 그림은 어떻게 됐을까? 가게 주인이 주워다가 버렸을지도 모르고 혹은 그 작은 섬에서 도로 깜빠이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림을 버리고 간 걸 발견한 깜빠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내 기준으로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나 다음에 만난 친구에게 다시 그 그림을 내밀면서 내게 보였던 그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을지도... 


Posted by Lyle



우리나라 사람들 꽤 잘 삽니다. 그냥 돈만 많아서 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남의 나라 구경도 갈 줄 알만큼 잘 삽니다. 랜즈알 하나 제대로 못 깎는 나라에서 카메라 보급률은 어찌나 높은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의 최신 장비들로 무장하지 않은 여행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가족이 여행가면 애, 엄마, 아빠 한대씩 카메라를 가져가는 게 한국사람들입니다.


그런 한국여행자들이다보니 여행가면 사진을 엄청 찍어댑니다. 메모리가 허락한다면 아마 출발에서 도착까지 동영상으로 남기려할지도 모릅니다. 인천공항샷, 기내샷, 현지공항샷, 호텔샷, 화장실샷, 식당샷, 관광샷, 셀프샷, 샷샷샷… 정말 엄청납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요새 여행경험을 글로 적나요? 사진이 글자보다 많을 게시글도 꽤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직접 갈 필요도 없이 왠만한 곳들은 인터넷에 올라온 다각도의 사진들로 구경해도 되겠다 싶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거의 모든 유명관광지들은 인터넷에서 앞/뒤/옆모습들을 보고싶은 방향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거의 먹어본 거나 진배없는 느낌을 주는 솜씨좋은 음식사진들까지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냥 줄줄줄 스크롤하면 남들이 돈들여 시간들여 다녀온 여행을 몇 분만에 손가락으로 답사하는 샘이 됩니다. 물론 갈수록 사진찍기가 귀찮아지는 여행을 즐기는 저는 그렇게 보고도 직접 가보거나 이미 가봤더라도 또 갈 생각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뭐가 문제라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모르겠는 사람들을 위해 한 문장으로 지금까지를 요약해드리자면, 그렇게나 여행사진들이 우리 주변에 차고 넘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남들이 감사히 공유해주신 여행사진들을 보면서 불편해질 때가 간혹 있습니다. "저들에게 초상권이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기계적 흥미 때문에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카메라가 한 열대쯤 되는데, 사람은 기계만큼 흥미가 없는 건지 왠만큼 흥미로운 순간이거나 일부러 연출한 상황이 아니면 인물 사진은 거의 찍지 않습니다. 의식하고보면 어디에서건 거의 모든 인물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도촬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죠. 제가 전통무예를 하는 곳에 관광객들이 와서 사진을 찍을 때도 저는 같은 이유로 찍지 말라고 부탁하거나 강하게 거부하기도 합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저에게 이유를 물어볼 때면 "I have a privacy" 라고 대답을 하죠. 물론 같이 전통무예를 즐기는 다른 분들중엔 그렇게 사진 찍히기를 즐기거나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터넷 어디선가 멋대로 걸려진 본인 사진을 걱정하는 태도야 그렇게 저마다 다를 수 있는데, 더이상 가족엘범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터넷을 쉽사리 떠돌게 될 그 한 컷을 저는 절대 허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이 정중히 허락을 구한다 해도 한국이 참 까칠해졌다고 소문날지언정 앞으로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참 보기 좋은 여행사진들이 인터넷에 많습니다. 여행자 본인의 연출되지 않은 어울림 순간을 찍은 사진들인 경우 저는 가장 즐겁고 순수하게 감상하게 됩니다. 여행자 본인이 사진 속에 있건 없건 그것이 현지인들과의 자연스러운 어울림 속에 나온 사진인지 아닌지는 누구나 쉽게 분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지인들과의 어울림 순간일지라도 본인 얼굴만 모자이크한 채 게시한 사진을 발견하면 "씨발" 하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연출이거나 도촬이더라도 현지인들의 이색적인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도 꽤 즐겁게 바라보곤 합니다. 하지만 정도를 따지지 않고 저건 도촬이거나 혹은 카메라 든 이방인의 폭력임을 언제나 조금씩은 생각합니다. 피사채가 웃고 있더라도 그걸 내맘대로 어딘가에 걸어놓는 순간 그건 작은 폭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지에서 (특히 인도에서) 현지인들이 사진 찍힌 후에 돈을 요구할 경우 돈을 줬습니다. 그렇게 명분을 사고나면 제 행위에 대해 편리한대로 사면을 받는 샘이고, 이후 내맘대로 어디에 게시를 해도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니까요. 어딜 가나 현상 맡기기 위해 억지로 한 롤 간신히 채워내곤 하는 여행사진의 대부분 혼자 보고 말기 때문에 게시하지도 않을 거면서 일단은 그렇게 합니다. 생각이 그렇다보니 어울림 사진을 얻지 못할바에는 사람 사진을 찍으려는 생각 자체를 거의 하지 않게 됐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혹은 욕심에 따라서 자의적인 예외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메라가 흔한 내가 그들을 대함이 카메라가 없는 그들이 나를 대하는 것과 똑같아야겠다는 생각은 그대로 입니다.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India2014. 1. 27. 01:08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Iran2011. 4. 10. 17:47

1월 28일, 금요일에 극적으로 이란 비자를 받았습니다. 비행기 출발을 12시간 정도를 남기고서, 비행기를 취소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주한 이란영사관에서 비자를 찾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죠. 사무실에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영사관에서 비자를 찾아오는 일, 짐싸는 일, 그리고 환전이 가장 큰 문제었습니다. 영사관 방문은 친구에게 부탁해놓았고, 짐싸는 일은 퇴근 후 집에 가서 하면 됐죠. 진짜 문제는 환전이었는데 인천공항 은행도 10시 무렵엔 문을 닫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요. 퇴근하자마자 집에서 배낭 꾸리고, 공항리무진 타고 공항까지 밤 10시 전에 도착하고 그 사이에 친구도 만나서 비자도 건네받아야 했죠. 그래도 비자가 나온 게 정말 다행이었지 뭡니까. 나머지 일들은 즐거운 스릴!

이란 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은 초청장을 받는 과정과 영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젠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들이 많아져서, 입국에 비자가 필요한 나라라도 서류와 돈 내고서 며칠 후에 찾으러 가면 되는 인도 처럼 쉽게 생각한다면 실패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서 이란 비자를 받고자 한다면 최소 한 달 전부터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솔찍히 한 달도 불안합니다. 신청하는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고, 게다가 주한 이란 영사관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쉬고 이란 현지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쉬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초청장 (IRI E-Visa) 신청은 http://evisa.mfa.gov.ir:7780/mfa 에서 하면 됩니다. 지금 접속해보니 지난 몇개월 사이에 양식이 조금 단촐해졌네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입력하는 방법이 자세히 소개된 글이 있는데, 전에는 띄어쓰기도 하면 안됐었나봅니다. 그런데 제가 신청할 때만 해도 띄어쓰기 해도 괜찮았고 그냥 상식적으로 쓰면 됩니다. 더욱이 이젠 전처럼 쓰기 애매한 질문들도 없어졌군요. 그런데 문제는 본인 사진과 여권 스캔 이미지 입력이에요. 각각 제한된 사이즈가 꽤 작아서 사진/여권 스캔에 애를 먹게 됩니다. 여권사진은 비교적 쉽게 했지만 여권 스캔 이미지를 40k 제한에 맞추기가 어려워서 크기를 작게 스캔했더니 글씨가 읽히지 않는다며 한 차례 disapprove 됐습니다. 그렇게 한 번 거절당하는 데도 1주일씩 걸리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거죠. 글씨 다 알아볼 수 있게, 칼라로 스캔해서 업로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란에서 IRI E-Visa approval 이 이메일로 도착합니다. 자칫 approval 이 도착하면 그것 자체가 Visa 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 끝난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래는 제가 받은 approval 내용인데 3 working days 후에 주한 이란 영사관에서 비자를 찾기만 하면 될 것처럼 되어있었죠.

خانم / آقاي HONGJOO LEE 
عطف به درخواست رواديد شما به شماره 2000097672 به اطلاع ميرسد که باتقاضاي شما به شماره مجوز 882531 موافقت بعمل آمده است . لطفا پس از گذشت سه روز کاري از دريافت اين موافقتنامه به نمايندگي جمهوري اسلامي ايران در SEOUL مراجعه و ضمن ارائه مجوز فوق نسبت به اخذ رواديد خود اقدام نماييد .
اداره رواديد و گذرنامه / وزارت امورخارجه 

Dear Mr./ Mrs. HONGJOO LEE 
With reference to your visa application No 2000097672 , we are glad to inform you that your request is approved under No. 882531. . After 3 working days of receiving this approval , please approach in person the Iranian Embassy / General Consulate in SEOUL . and collect your required visa .
Best regards,M.F.A / Passport and Visa Office .




정확한 과정은 제가 알 수 없지만 초청장이 주한 이란 영사관으로 도착해야 영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할 수가 있습니다. approval number 를 가지고 영사관에 전화로 확인해보면 도착여부를 알려주는데, 이메일에는 3일 걸린다고 되어있었지만 제 경우는 3주가 걸렸습니다.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초청장을 신청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입니다.

초청장이 주한 이란 영사관에 도착하면 영사관에서 알려준 계좌로 은행에서 입금한 후 입금증을 가지고 영사과에서 비자 신청을 해야 합니다. 은행에서 발급해준 입금증을 첨부해야 한다는 이유로 온라인 입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꼭 은행을 방문해야 하죠. 그렇게 영사과에 비자 신청을 하면 나흘째 되는 날에 비자가 나옵니다.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Spain2010. 9. 24. 00:56


여행자에게 만남만 있을 뿐 헤어짐은 없다.

일상 속에서도 조금 더 긴 여행이었다고 생각하면...


Posted by Lyle
안티구아에 있는 정글파티 호스텔은 과테말라 론리플래닛에서  평이 좋은 곳 중 하나입니다. 사실 론리플래닛 리뷰를 보고 그런 곳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너무 젊은 애들 취향에 이름 그대로 새벽까지 시끄러운 파티가 이어져서 길게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장점이 있는 호스텔입니다. 도미토리 호스텔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라운지인데 이곳은 라운지가 잘 갖춰져 있더군요. 라운지 같은 공간이 없으면 도미토리 투숙자는 온종일 밖에 나가있거나 침대에 누워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꽤 훌륭한 아침식사를 포함한 숙박비가 저렴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곳 호스텔이 좋은 게 있다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사람들이랑 놀아준다는 거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젊은 애들의 파티에 끼어들기 어려운 저같은 사람에게도 쓰다듬어 달라며 다가오는 개 입니다. 거의 온종일 여기저기 누워있다가 사람들이 많아지면 여기저기 털래털래 뛰어다니며 꼬리로 사람들을 툭툭 치면서 만져달랩니다. 냄새가 좀 나는 게 문제긴 한데 이렇게 붙임성 좋은 개라니, 라운지의 쿠션 의자 위에 마치 사람인냥 널부러져 있는 녀석을 보면 절로 흐뭇해집니다.

+

언젠가 제가 여행자 숙소를 열게 되면 커다란 개를 키울 생각입니다. 사람들끼리는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낯을 가린다 해도,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 없이 모두와 친해질 수 있는 개는 호스텔의 아이콘이 되어줄 겁니다. 그리고 그런 핑계가 아니면 언제 그런 커다란 개를 키워보겠어요. 그리고 기왕이면 고양이도 두어마리 키워야겠군요. 지금 같이 사는 탈리가 죽고나면 현실적인 문제로 또다시 고양이를 키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는데, 그리고 탈리를 항상 집에만 가둬두고 있는 게 딱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여행자 숙소라면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도록 해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네요.


Posted by Lyle
어제 아침, 스페인어학원에서 수업받던 중 쉬는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허리에 통증이 왔다. 그 후로 허릴 구부릴 때 가끔씩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지만 살살 다니니까 괜찮길래 자고나면 나아지길 바라면서 자고 또 잤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땐 통증이 더 심해져있었다. 이젠 허릴 구부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앉아있기도 힘이 들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사흘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세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마지막 LA 발 서울행 비행기는 공항 대기시간만도 12시간이고, 비행 시간은 그보다 길다. 그런 힘든 여정을 앞두고 이만큼 허리가 아프다는 건 여행이 여기서 끝났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쉬움을 넘어 두려움에 가깝다.

약국엘 가서 진통제 두 알과 파스 한 장을 사왔다. 이 더운 날에 뜨거운 찜질 파스밖에 없다는데, 그것도 달랑 한 장에 17.8 께찰 (약 2,700원) 이나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일단 진통제부터 먹고 파스를 뜯었다. 혼자서 내 등허리에 파스를 붙여보려고 애쓰다가 파스가 반으로 접혀 붙어버렸다. 갑짜기 울컥해졌다. 혼자서 타지에 있을 때의 아픔은 고통스러움 보다 서러움이 더 크단 걸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 기분을 알꺼다. 파스의 끈끈이가 어찌나 세던지 접혀서 붙은 걸 떼어서 써보려고 했지만 파스가 찢어질지언정 떨어지진 않았다. 잠시동안 가만히 분을 삭혀야만 했다.

파스를 쓰지 않고 진통제로만 참아보려고 생각했다. 17.8 께찰이 어찌나 아깝던지 말이다. 그러나 곧 다시 파스를 사러 나갔고 약국 아줌마가 18 께찰을 건낸 내게 "Está bien" 하면서 잔돈을 주지 않는 바람에 아줌마더러 등허리에 붙여달래볼까 하던 마음이 쏙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이번엔 아까의 시행착오를 딛고 제대로 붙여냈다.

그런데 파스가 어찌나 뜨거운지 허리 통증더러 저리가라 하는 것 같았다. 참아보려고 해도 신음이 절로 나왔고 그냥 뗘버리자 싶은 생각도 여러번 찾아왔다. 가만히 참고서 누워있을 수가 없어서 Flores 섬을 여러바퀴 돌았다. 섬을 둘러싼 호수에서 한가롭게 수영하는 사람들,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호수를 건너기 위해 배를 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걸 보면서 조금은 참아내기가 수월해졌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다가 숙소 바로 앞 맞은 편에서 약국을 발견했다. 여길 두고서 아까는 섬 반대편에 있는 약국까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씩씩대며 두번이나 다녀왔던 데 헛웃음을 짓는 되는 여유도 생겨버렸다.

그리고 뭔가가 그리워졌다. 나의 아픔에 주름을 더해가며 늙어가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시는, 그래서 기쁜 일 말고는 차라리 숨길 수밖에 없게 되버린 부모님이 아니라 아직 잡히지 않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생겨난다. 잡아본 적 없는 것이 그리움이라고 불리는 건 그게 가족의 의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쿠션이 다 망가진 침대에서 자는 일이 내게 어울리고 또 아무렇지 않게 견뎌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이젠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혼자 되는 것도 그렇다.

이 뜨거움도 통증만큼 쉽게 사그러들질 않는다.

Posted by Lyle
This town, Flores in Guatemala is too small, even a map is not necessary. But suddenly I saw a map of the world in such contradictory condition. I found that the city in Mexico where I traveled two years ago is reachable from here without difficulty. Why didn't I think about that it wasn't that hard to cross the border to visit Guatemala at the moment. Furthermore, Louis who I met and traveled with a few days in Mexico and Cuba had told me that he had been in Guatemela to improve his spanish before traveling Mexico and the story made me to plan this journey into Guatemala.

The point at this time is the plan. I had a prepared root of traveling Mexico and Cuba and it had to be done so that I never had considered about crossing the border between Mexico and Guatemala. Also this time, though a trip to Flores after Antigua was all in a sudden, still I cannot imagine about moving on to south for traveling another countries or reunion with Louis who is in Panama.

Someday, if another journey could happen in a future and I really hope so, I might look back on this time and ask myself the same question, why didn't I do that at the time. That is why I'm suffering from imaginary departure, an impule to break all the plans at this point in my life.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Africa2010. 6. 28. 00:28
캐이프타운을 떠나던 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백패커스를 떠나며 도미토리의 다른 여행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부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내게 떠나느냐고 물었다. 그때 처음 마주친 그녀와 내가 오버스럽지만 마치 함께 밤을 보냈던 것 같은 인상을 남기게 된 건 그녀가 내 앞에서 팬티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마주쳤던 백패커스 부엌 테이블. 그녀는 금발이었고팬티 색깔은 기억나질 않는다.


+

백패커스의 라운지 한쪽 선반에 커다란 와인잔이 있었는데 거기엔 콘돔이 가득 담겨있었다. 지나가면서 얼핏 보고 궁금했지만 차마 이게 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별로 필요도 없는 물건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성적인 것이 아닌, 그게 거기 왜 놓여있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이었다. 그러니 느낌상 공짜 같긴 했어도 괜한 오해를 살까봐서 공공의 장소에 놓인 그것에 다가가기조차 쑥쓰러웠다. 기실 아무도 날 바라보고 있지 않고 아무도 내 행동에 대해 오해하거나 판단조차 하지 않는 곳에서 주목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조심성은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란 걸 안다. 기념품 삼아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딱 두 개 집었는데, 왠지 훔쳐낸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공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자발적으로 어딘가에 동전을 기부하거나 "나 다 컸어요." 라는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리셉셔니스트를 찾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중에 집어온 걸 몰래 꺼내볼 때서야 뒷면에 "NOT FOR SALE" 이라고 적힌 걸 발견했다.

레드리본 마크가 후변에 인쇄된 콘돔은 남아공의 보건국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다. 인쇄된 글씨를 보면 09년 12월로 유통기한이 지났다.


+

전세계에서 AIDS 환자가 가장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들의 HIV 바이러스 감염율은 11% 에 달한다. 이중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는 감염자는 30%도 되질 않는다. 그런데 2002년부터 2008년 사이 10대들의 HIV 바이러스 감염율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같은 기간 10대 감염자들이 20대로 이동한 만큼 20대 이상의 감염율이 상승한 것은 콘돔의 보급 때문이다.

남아공에서는 레드 리본 캠패인 마크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레드 리본 캠패인이란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화합을 이루자는 취지의 운동인데, 그것의 상징인 레드리본은 따뜻한 혈액을 의미한다. 그런 레드리본은 그냥 길을 가다가도 벽이나 간판에 그려진 걸 무심코 보게 될만큼 꽤나 흔한데,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는 캠패인의 국제 지원금을 여기저기 레드 리본을 그리는 데 탕진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캠패인 자체를 홍보하는 것보다 남아공 국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콘돔의 보급이었다.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2010. 5. 24. 11:09
가장 편리한 말 '친구'를 빌렸을 뿐,

그보다 멀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고,

가끔씩은 그보다 더 깊다고 착각하거나 믿고 싶거나 정말 그랬던 우리.

당신과 나는 살아가며 점점 더 옅어지는 '친구' 라는 말을 더 희미하게 만들며 스쳐지나간 사람들.



페루에 있다는 당신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이야기하며 그곳에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이상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될 거라고 했었다.

그러니 내가 찾을 수 있는 뭔가 흔적을 남겨달라고 했었다.

소설 속에서만 알던 배경에 나만 들어있는 여행이 아닌, 내게 좀 더 특별한 조우가 되어달라고 했었다.



이렇게 우리가 맹물에 가까워질 줄 몰랐던 것만큼,

나에게 남미 여행이 이렇게 젊은 일이 될 거라고는,

아직은 당신이 떠오를 때의 일이 될 거라고는,

......



저 페루에 가요.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한국2010. 2. 11. 13:30
제한된 시간 안에 여행을 해야 한다는 건 여행전부터 이미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짧은 여행은 그만큼 목적도 뚜렷해야 하는데 그것부터가 스트레스가 되곤 하죠. 그리고 혹시 여정 안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틀어질 경우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될 불안함도 있고, 그렇게 됐을 때 허무해지지 않도록 차선안까지 마련하기란 즐거움이면서도 동시에 괴로움입니다. 사실 제가 하는 여행들이 대게 별 목적이 없는 여행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자전거 여행이든 산행이든 시간 안에 목표한 곳까지 가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다보니 무언가를 구경하거나 하는 식의 여행과는 다를 수밖에요.

이번 음력설 기간에 산행을 갑짜기 준비하게 됐습니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연속 종주할 계획입니다. 아주 다양한 여정의 조건들을 이렇게 저렇게 짜맞춰서 여정을 짰네요.
 
12(금) : 서울시 -> 구례군 보석사우나 (1박)
13(토) : 구례군 -> 성삼재 등산 -> 장터목 산장 (1박)
14(일) : 장터목 산장 -> 천왕봉 -> 백무동 하산 -> 함양군 -> 영각사 등산 -> 삿갈골재대피소 (1박)
15(월) : 삿갈골재대피소 -> 향적봉 -> 삼공통재소 하산 -> 무주군 -> 대전시

이게 얼마나 어렵게 짜여진 여정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일단 대수송 기간이라 서울-구례 시외버스 예매가 불투명했고, 천왕봉 근처라 인기 좋은 장터목 산장 또한 대기예약도 안되는 상태였습니다. 특히 지리산에서 내려와서 바로 덕유산을 오르기 위해 그 사이 최단거리 운송수단과 이동경로를 알아보는 게 가장 큰 문제였죠. 다행히 버스표도 구했고 산장 예약도 마쳤고 함양군 시외버스터미널을 거치면 지리산과 덕유산이 연결된다는 것도 알아내서 저렇게 여정을 짤 수 있었지만, 지금도 확인해볼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이짓을 한다고 지도 펼쳐놓고서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오고 어디를 거쳐야 하나를 고민하며 골치를 썩었죠. 

오늘 눈이 내리니까 이번 산행이 고달플 게 걱정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설경이 더 기대되네요.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India2009. 11. 3. 23:55
자정무렵에 도착한 숙소는 무척 생경했다. 사실 공항을 빠져나온 후부터 계속된 그 느낌은 낯설음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서울과똑같은 건 어둠 뿐이었다. 낯선 피부의 사람들이 오고가고, 지나치는 나무들이 평소 보던 것들과 다른 모양을 하고있거나 서울보다 짙은 매연에 코가 찡한 곳이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그것들이 평소 생활했던 곳처럼 정돈되어있지 않고 어지럽게 흩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둠이 가린 채 첫 만남에 그것들을 다 보여주지도 않고 있었다. 내가 익혀왔던 살아가는 방법들이 이곳에서는 아무짝에 소용없을 것만 같았다. 그냥 똑바로 길을 걷는 일조차도 말이다.

한참을 걸려 도착한 게스트하우스역시 그랬다. 창문 하나 없이 벽 네 개와 출입문 하나, 그리고 침대가 전부인 걸 방이라고 불러보긴 처음이었다. 문을 걸어잠그고 침대에 누웠을 때 천장에 메달린 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선풍기를 발견했다. 비록 사물이었지만 나말고도 이곳에서 숨을 내뿜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는 걸 발견하고서 약간은 안심했다. 지금은 12월, 이내 선풍기도 낯설어졌다. 다행히 긴장감을 잠재울만큼, 나는 피곤했다. 쿠션이 다 망가져서 스폰지 같았던 침대 메트리스가 내 몸을 빨아들였다.





잠에서 깨었을 땐 아직 어둠이 가시기 전이었다. 어제 나는 이곳 빠하르간지 메인바자르(Main Bazaar)의 길가에 사이클 릭샤(인력거)를 세워놓고 잠들었었다. 이곳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이 많기 때문에 종종 그렇게 하곤 한다. 그 이름처럼 이곳이 시장이긴 하지만, 사실 물건 사러온 손님들보다 훨씬 더 큰 돈벌이가 되는 건 여행자들이다. 뉴델리의 여행자들이라면 누구나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묵고 있거나 인접해있는 "뉴델리 기차역" 에 드나드는 여행객들로 언제나 넘쳐난다. 여행자들이 흥정에 익숙해져있긴 하지만 여전히 나같은 릭샤 왈라(꾼)들에게 후한 편이어서 다른 곳보다 이곳에서의 벌이가 좋다. 그들이 최선을 다해서 깍았을지언정, 적어도 시장 손님들보다는 많이 준다.

하지만 오토릭샤들 때문에 쉽지만은 않다. 내가 먼저 입질을 해도 내 뒤에서 오는 오토릭샤 왈라에게 손님을 빼앗기는 일들이 점점 더 자주 벌어지고 있다. 외국인들에겐 오토릭샤 요금마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더 편한 수단을 선택하는 걸 꺼다. 그게 더 편하다는 것은 더 빠르고 안락해서일 수도 있지만, 힘들여 페달을 구르는 나를 등 뒤에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래서 릭샤 페달 밟으며 산다는 게 조금씩 더 어려워진다.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끄는 릭샤를 델리에서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것과 비슷한 과정을 밟아 가고 있잖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오토릭샤가 일을 나오기 전부터 난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다.



시차를 극복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첫날부터 부지런을 떨 작정이긴 했지만 새벽 네시, 그렇게 잠을 일찍 깰 수 있었던 건 절반은 내 탓이 아니다. 침대에 말똥말똥 뜬 눈으로 여전히 돌고 있는 천장의 선풍기를 바라보며 한참을 있었지만 다시 잠들거나 하진 못했다. 내 일상 속의 평범한 아침은 이런 나를 낯설어할 거다. 천천히 그날의 채비를 하고서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는데 곧바로 도로 들어가버릴 뻔했다. 밖은 너무나 어두웠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 차고 있던 손목시계로만 가늠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시계가 고장인가 싶을만큼 현실감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뉴델리역에 가서 바라나시로 갈 기차표를 예매해야 했고, 그전에 여행 여정을 짜는 데 무척 요긴하게 쓰일 'trains at a glance' 라는 기차시간표 책도 사야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빠하르간지란 곳에서 얼마 멀지 않다고 가이드북에 씌어있긴 했지만 그게 어느 방향인지 짐작할 수 조차 없었다. 공항에서 날 픽업했던 사설택시가 이곳이 내가 예약한 숙소라며 데려다줬을 뿐, 난 내가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이 안됐다. 게다가 현위치가 어딘지 안다 해도 이런 어둠 속에서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릭샤라는 걸 탈 시기가 온 거다. 사람이 끌거나 자전거 또는 오토바이가 끈다는, 인도에 가면 반드시 타게 된다는, 여행자의 발이 되어준다는, 감을 잡아가며 흥정하는 법도 익혀야 한다는 인도의 대중교통수단 말이다. 아직 인도 땅을 두 발로 걷기도 전이라 조금 이르고 어쩐지 준비가 덜 된 것 같긴하지만.



하루 일과중에 틈틈히 시간 날 때마다 잠을 자기 때문에 밤이라고 해서 그리 긴 시간을 잠들어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릭샤를 침대 삼아 잠드는 건 나의 일상이 돼버렸다. 땅바닥에서 잠드는 게 더 편할진 모르지만 그랬다가는 릭샤를 도난당할지도 모른다. 임대료를 내고 쓰는 처지에 그건 절대 있어선 안되는 일이다. 고향을 떠나 돈을 벌러 델리에 와있는 같은 처지의 아이들끼리 모여사는, 그래서 집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은, 숙소에 가봐야 벽과 천장으로 가려져있을 뿐 잠자리로써 딱히 더 나을 것도 없다. 잠들기 직전까지만 참아내면 그만일 정도로 밤 추위에 익숙해진 후부터는, 그날그날 일이 끝난 곳이 내 집이고 잠든 곳이 내 방이 되어줬다.



밖엔 아무도 없었다. 땅에서 발을 뗄 때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험 같이 느껴졌다. 릭샤를 찾아야 했지만 돌아오는 길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내 앞보다 뒤가 더 어두워졌을 때 쯤 사진으로만 봤던 사이클릭샤를 발견했다. 두 명의 손님을 앉힐 수 있는 수레가 자전거 뒷바퀴 대신 고정되어있었다. 길가 담벼락 옆 어둑한 곳에 세워져있었는데, 멀찌감치서 처음 발견했을 때는 주인 없이 그냥 서있는 줄 알았지만 조금 더 다가가서 보니 그 위에 사람이 누워있었다.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 위 허리를 받치고서 다리는 핸들에 걸친 채 어깨와 머리를 손님용 안장 쿠션에 눕힌 모습이었다. 그런 자세가 무척 익숙해보였고, 그가 자전거 프레임처럼 말랐기 때문에 어울려 보이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편안해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잠들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두운 색 옷 아래로 앙상한 검은 발목과 맨발이 보였다. 나는 마치 그에게 다가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어둠 속에 그의 하얀 눈이 돌아선 나를 바라보며 어딜가냐고, 데려다 주겠다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쫓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휴...



첫 손님을 발견했다. 나를 부르지도 않은 그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맞은편에서 또다른 사이클릭샤 한대가 나를 빗겨 갈 것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짓으로 그를 불러세웠다. 방법은 택시를 부를 때와 같았다. 단지 손을 흔드는 소극적인 정도로도 적극적인 그들이 반응하게 만드는 것. 익숙한 삶의 방법 중 하나가 여기서도 통한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릭샤 왈라는 스무 살도 채 안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걸 기대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미국인을 만난 것처럼 한껏 발음을 굴리며 외쳐댔다. 되지도 않는 원어민 흉내가 내 딴에는 일종의 배려였달까? (아니다, 그건 그저 상습화된 가식인 듯.)

"아임 고잉 투 뉴델리 스테이션"



 100루피를 불렀더니 그는 멈칫했다. 당황하는 것 처럼 보였지만 보통 흥정을 시작할 때는 황당하게 하는 게 우리의 관례다.



어제 내가 머무른 숙소가 250루피었는데, 여기서 멀 것 같지도 않은 뉴델리역을 가기 위해 100루피는 말도 안된다. 하지만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 어떻게 흥정을 해야 하는 건지 감도 못잡고 있는 상태여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난 아직 '루피' 에 낯설었다. 또다시 열씸히 발음을 굴려가면서 릭샤왈라가 알아듣던 말던 떠들어댔다. 기차역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 100루피는 너무 비싸다고 말이다. 그는 바로 출발해버릴 것 같은 자세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알아듣고도 모르는 척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깍나 싶어 말하기 미안한 감이 들었지만 마음 속으로 가격을 정했다. 그리고 그에게 30루피를 불렀다.



흥정엔 긴 말이 별로 필요 없다. 그저 짧게,

"50루피"



난 아까 했던 말들을 반복하고만 있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둥, 50루피는 너무 비싸다는 둥 말이다. 손가락을 펴보이며 5루피를 얹어줬다.

"35루피"

그렇게 그는 내 첫번째 릭샤 왈라가 됐다.



개시부터 35루피면 괜찮다.



릭샤 왈라는 나를 태우고서 내가 걷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릭샤가 덜컹거릴 때마다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한 채 서서 힘겹게 페달을 구르는 그가 더욱 힘들어 보였다.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면서 내 지각은 어설프게 내가 어디쯤 와있나를 판단하려고 하기 시작했다. 뉴델리역이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면서 느낌상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어차피 같은 돈인데 멀리 돌아갈 것 같진 않지만, 왠지 릭샤 왈라가 자전거를 모는 방향이 아까 들어왔던 방향을 돌아서 반대로 향하는 것만 같다.



걸어가도 될 거리를 35루피나 받고 가자니 어쩔 수 없었다. 오토릭샤를 탔더라도 35루피까지 필요 없는 거리였다. 미안해서라기보다 손님이 가까운 거리를 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약속한 35루피를 다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좀 태우고 도는 수밖에.



릭샤왈라에게 돈을 지불하려고 했을 때 50루피보다 작은 잔돈이 없었다. 그나마 50루피도 어제 방값을 지불하고서 거슬러받았기 망정이지, 공항에서 환전했을 땐 100루피, 500루피, 1000루피 지폐들 뿐이었다. 50루피를 받아든 릭샤왈라는 어째 거스름돈 주기를 망설이는 것 같다.


  
잔돈을 갖겠다는 시늉을 해봤다. 그럴 땐 갖고 있는 잔돈이 없어서 못 주는 상황이라는 것과 불쌍한 척을 함께 해야 한다. 알아든는 여행자들에겐 "박시시" 하면서 자비를 구하면 통할 때가 있지만, 그는 아직 여행자라기보다 이방인일 뿐이다..



이른 아침 릭샤를 타고 쉽지않게 도착한 기차역에서 나는 또다른 우여곡절들을 격어야 했다. 그 시간들은 마치 오리엔테이션 같았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기차역에서 헤맸지만, 인도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많은 걸 배웠고 결국 원하던 기차표와 시간표책자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온전히 떠있는 해를 처음 봤다. 처음 내게 스스로를 열어보여준 거다. 햇볕을 쪼이며 빠르게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기차역에서부터 게스트하우스까지 걸어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저 차도를 한 번 건넌 후 메인바자르라고 적힌 커다란 푯말의 시장 입구를 들어서서 줄곧 직진했을 뿐이다. 초행이었던 길이었음에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침에 50루피나 줬던 릭샤 왈라가 떠올랐다. 흥정에 조금 감을 잡기 시작했다.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India2009. 11. 1. 03:24

바람의 궁전, 하와 마할

2005년의 새해를 맞이한 곳은 인도의 핑크시티 자이뿌르였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델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자정이 되기 두어시간 전이었는데, 새벽에 출발할 기차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될 무렵이기도 했다. 기차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전화가게에 들러 쓸쓸히 새해를 맞으실 부모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인도는 아직 2004년이었다.

내가 예약해놓은 기차는 일반적으로 배낭여행자들이 이용하는 SL 클래스가 아닌 2A 클래스였다. 하나의 컴파트먼트의 양쪽 벽에 3개씩 총 6개의 간이침대가 설치된 SL 클래스와 달리, 2A 클래스는 더 넓고 깨끗한 간이 침대가 벽에 2개씩 총 4개가 설치되어있고 게다가 에어컨에 식사까지 나온다. 화장실 역시도 뭔가 묻을 것 같아 쪼그리고 앉기 어렵게 만드는 SL 클래스의 그것과는, 일단 앉지 못할 거부담이 없다는 정도로 달랐다.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껴서 타는 현지인들과 섞여야 하는 SL 과 달리 내 공간을 침범하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2A 클래스 표를 사는 현지인들의 카스트(?)가 달라서 되려 내가 천민인 것 같은 미안한 느낌마저 든다. 한마디로 인도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황송한 여행이 가능하다. 기차삯도 2A 는 SL 보다 두 세 배 이상이다. 그렇다고 돈으로 서로 다른 카스트를 넘어 설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거기서 외국인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SL 이 아닌 2A 클래스를 선택한 이유는 그런 안락함(?) 때문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 자정 넘어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시간까지 숙소에서 머물다가는 자이뿌르의 비싼 숙박비 하루치를 더 부담해야 할 판이었다. 전 날 새벽에 체크인했음에도 자정을 넘기면 돈을 더 내야한다고 융통성 없이 구는 숙소 리셉셔니스트에게 맘이 상해버렸다. 자정 전에 체크아웃을 하게 된다면 그 시간에 딱히 갈 곳이 없었고, 결국 화장실과 샤워시설까지 있는 --- 그런 게 있어도 별로 이용할 것 같진 않지만 --- 깨끗한 대기실(waiting room)이 제공되는 2A 클래스를 예약한 거다. 어차피 비싼 자이뿌르의 하루 숙박비를 보태면 SL 에서 2A 로 점프가 가능했으니 기회비용을 따졌을 때 2A 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마지막 행선지 델리를 앞두고 인도사람들에게 상당히 피곤해져있었다. 그래서 2A 클래스 열차는 여행에 지친 나를 달래는 일종의 장치 같았달까. 인도의 기차역에서는 마치 추석 귀성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울역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양반이다 싶게 여겨질만큼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 걸 보게 된다. 그렇게 또 현지 사람들 사이에 시선을 받으며 둘러쌓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연착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기차를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고보니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건 바로 휴식이고 위로였다. 아마 그시점에 새해를 맞으며 부모님 생각이 났던 것도 그 연장선에 있었던 듯. 일반 대기실이 아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의 기다림은, 비록 그 안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심심하긴 했지만 의도하지 않은 휴식이 되어준 것 같다.

꽤나 빡빡했던 여행 일정 속에서 이제 코 앞의 델리행 기차를 놓치지 않는 것 외에도 내겐 해결되지 않은 걱정거리 하나가 남아있었다. 나는 과연 델리에 도착해서 트리베니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 시타르를 건내받을 수 있을까!

트리베니 뮤직센터에 처음 갔던 날 시따르를 주문하면서 돈을 지불할 때 레디시는 내가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에 악기를 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케이스 제작을 이류로 한 번 미루고 두 번 미루더니 결국 받지 못하고 바라나시를 떠날 판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하며 화가나기까지 했다. 인도는 당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약속이란 건 있지도 않을 뿐더러 해도 믿을 것이 못되는 곳이란 걸 되새기게 됐다. 그리고 그건 인도 사람들에게 피곤함을 느끼는 이유중 하나였다. 

내가 할 말을 잃고서 난감해하자 레디시는 내게 앞으로의 행선지를 물었다. 다른 도시들을 며칠간 돌다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델리로 들어갈꺼라고 했더니 델리에 머무는 날에 맞춰 숙소로 사람을 보내 내게 악기를 건내주겠단다. 그러면서 운송료로 2000루피를 요구했다. 일단 그 운송비란 게 상당한 금액이었고 악기 출고를 미룬 게 그들임에도 운송비를 내가 부담해야하는 상황도 따져묻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 악기를 인편에 전해주겠다는 그 말을 믿어도 될지가 내겐 가장 큰 의문이었다. 만약 그게 사기라면 나는 너무나 바보 같이 행동해서 어디 말하지도 못하는 창피함을 인도에 대한 상처로 가져야 할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행내내 커다란 시따르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건 되려 다행이었고, 또 나흘간 매일 트리베니로 레슨받으러 다니면서 봤던 그들과 얼굴 붉혀가며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냥 환불을 요구해서 시타르를 사오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던지, 밑도 끝도 없는 약속을 받아들이던지 둘 중 하나였다. 낯선 곳인 델리에서 누군가와 접선을 시도해야하고 실패하면 더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도 컸지만, 결국 2000루피를 더 줘버렸다. 뭔가 모를 좋은 기운에 이끌려서 그들과 믿지 못할 약속을 해버린 거다. 영수증이야 받았지만 이틀 머문 후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델리에서 그런 게 무슨 소용있겠나. 더구나 인도에서.

그런 사연이 델리에 들어가면 뭔가 일이 벌어질 꺼란 긴장 섞인 불안감을 피워냈고, 난 그걸 차분히 눌러가면서 자이뿌르 기차역 대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델리보다 더 '관광사기업'에 집중하는 아그라와 자이뿌르에서 나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시도하는 인도 사람들로부터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한적함을 즐기고 있었다. 나 말고도 한 무리의 현지들 서넛이 거기 더 있었지만 난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참동안 정적이 유지되나 싶었을 때 그들이 갑짜기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번갈아 얼싸안으며 큰 소릴 내기 시작했다. 자정이 되어 그들끼리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있음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럼없이 내게도 새해 인사를 건내며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들과 말문을 트게 됐는데, 그때만큼은 그들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새해 인사가 의외로 내게 커다른 위안이 됐던 것 같다.

인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은 후로, 난 외로웠던가보다.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Cuba2009. 10. 24. 14:30


아바나Havana의 초콜릿 박물관(Museo de la Chocolate) 내부에서 본 풍경입니다. 메르까데레스Mercaderes 거리와 아
마구라Amargura 거리의 교차점에 있는데 여타 건물들과 다를 게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카카오 모양의, 간판이라고 부르기에 소심해보이는 푯말이 하나 붙어있을 뿐이죠. 시내를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까마라 오스꾸라Cámara Oscura가 있는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한 블럭만 가면 오른편 모서리에 있습니다.

포크 모양으로 표시된 곳이 Museo del Chocolate


아바나의 초콜릿 박물관은 그 이름처럼 쿠바에서 생산되는 초콜릿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사용된 도구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기도 하지만 사실 박물관이기 보다 초콜릿 까페입니다. 삼시 세끼 먹는 것 외에 과일과 피자, 아이스크림 말고는 궁거질 꺼리라 거의 없다시피한 쿠바에서 초콜릿 박물관은 쿠바 내국인 입장에서도 이국적이라고 할만큼 고급스런 취향의 까페랄 수 있죠. 아주 다양한 초콜릿 음료가 차갑게도 뜨겁게도 나오고 쿠키나 초콜릿 과자등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가격도 그다지 비싼편이 아닌데다 시원하게 에어컨까지 나오기 때문에 한 번 들르게 되면 다시 오고 싶어질 겁니다. 저역시도 같은 날 다시 한 번 갔었는데, 정전이 되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길래 역시 쿠바스럽지 않은 곳은 쿠바에 없구나 하면서 아쉬워했었죠. (쿠바는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정전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쿠바는 초콜릿과 진한 인연을 갖은 나라는 아닙니다. 16세기 영국이 지배할 당시엔 카카오는 아직 음료로 유럽에 전파되질 않았었죠. 17세기에 스페인이 식민지 멕시코로부터 초콜릿 음료를 유럽에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쿠바 역시 스페인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스페인은 노예들을 쿠바로 이주시키면서 쿠바에서 카카오를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기후적으로 쿠바의 동부 지역에 재배지역이 밀집됐다고 합니다. 그만큼 재매한 역사도 짧고 멕시코처럼 그 지역의 토착문화였던 적도 없기 때문에 그저 강대국의 노동력과 영토 이용의 수단적인 의미로 시작되었죠. 어쨌거나 쿠바의 초콜릿은 스페인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들이 물러간 이후에 남겨져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쿠바의 초콜릿은 달콤함이나 다양한 취향을 상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럽의 초콜릿처럼 가공기술에 의한 맛있는 초콜릿도 아니고, 역사 깊은 재배지로써의 의미도 없는, 그저 일반적으로 쿠바에서 만나기 어려운 달콤한 맛을 쿠바에도 즐길 수 있다는 정도인 거죠. 무더위 속에서 잠깐의 휴식을 주는, 그렇다고 아무나 즐길 수는 없고 창 밖의 현지인들에게 창가 그늘 정도의 단절된 휴식만을 줄 수 있는 그런 곳. 그게 초콜릿 박물관이고 동시에 쿠바의 초콜릿인 겁니다.




Posted by Lyle
해일 같은 눈물, 난 딱 한 번 본적이 있다.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 앉은 어머니의 울음이 그랬다. 해일이 뭔지 모르는 내게, 그 순간에 그게 해일이었다.



에페스 유적지에서 다시 셀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적지 후문에서 한글이 적힌 성지순례단 관광버스를 발견하곤 그걸 얻어탔었다. 무임승차에 귀동냥까지 하려니 괜히 미안해져서, 그 뻘쭘함을 견디기 위해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셀축과 에페스 사이에 위치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옛 터를 지날 무렵 인솔자가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여러분들 왼쪽에 보이는 곳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터 입니다. 지금은 다 부서지고 터만 남았는데, 여러분들이 내렸던 에페스에서 보셨던 것들 중 일부는 이곳에 있던 것들을 옮겨다 놓은 것들이기도 해요. 자, 이렇게 여러분들은 오늘 세 곳을 보신 겁니다. 처음에 들르셨던 게 성모마리아의 집이었고요, 에페스를 거쳐서 들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인솔자의 그런 안내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의 말로 짐작컨데 아마 이들은 이 버스를 타고 성모마리아의 집을 거쳐서 에페스의 유적지로 왔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이곳에 성지순례를 오셨을 때 이런식으로 다니셨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머니께서 언젠가 말씀하셨던 성모마리아의 집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로써는 차편이 마땅치 않아 가보지 못했던 곳을 이들이 오늘 방문했다는 사실. 그곳에서 내가 확인해보고 싶었던 어떤 것을 이들이 봤을까 싶게 만들었다. 어머니께서 성모마리아의 자취를 쫓으셨던 것처럼, 어머니의 자취를 쫓아 성모마리아의 집을 가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지기도 했다.



몇 해 전 그날은 어머니께서 터키와 그리스로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후의 부활절이었다. 부모님과 난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막 식사를 마쳤는데, 날이 날인만큼 어머니께서 당신의 성지순례 경험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그의 제자 요한이 성모를 에페스로 모시고 와서 살게 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신자가 아닌 내겐 길어질 수록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데 에페스 유적지 뒷편 산자락에 위치한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던 이야기만은 경우가 좀 달랐다.

성모마리아의 집 안에서 보셨다는 성모마리아상은, 보통은 순백인 것이 너무 당연한데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얼굴만 검은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단다. 종교가 없는 나라면 도둑질 당한 성상의 일부를 다시 만들어놓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다거나 하는 세속적인 이유를 짐작했을텐데 어머닌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해석을 하신 것도 아니었다. 어머닌 성모마리아의 검은 얼굴에 대해 '어머니'로써의 공감을 녹이셨다. 십자가에 못이 밖혀 메달린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라면 그렇게 얼굴이 시커멓게 되고도 남을 꺼라는 거다. 당신의 그런 말씀은 한편으론 말도 안된다 싶긴 하지만 그건 이해나 공감 따위보다 차라리 성모와의 인간적인 합치 같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던 순간에,  아니 '순간'보다 더 짧은 시간,  당신의 말씀을 별 관심 없이 들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난, 뭔가 엄청나게 쏟아질 것 같은 기운을 느낀 채 당신의 얼굴을 바라봤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씀을 꺼내시면서 해일 같은 눈물이 당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고있다가 문득 당신의 눈물이 떠올라 버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낯선이에게 묻고 싶어졌다.

"성모상의 얼굴이 정말 검은 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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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Mexico2009. 5. 15. 09:49
멕시코 시티를 여행하는 가장 큰 재미라면 미술관 관람이었습니다. 프리다 깔로Frida Kahlo,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 등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여러 곳의 미술관들에서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아니더라도 인상깊은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에 멕시코 시티 여행일정 중 2/3 를 미술관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모던아트 미술관Museo de Arte Moderno 이었습니다. 모던아트 미술관은 거대한 차풀테펙Chapultepec 공원을 가로지르는 레포르마 도로Paseo de la Reforma 의 옆에 위치하고 있고, 맞은편에는 루피노 타마요 컨템퍼러리 미술관Museo de Arte Contemporareo Rufino Tamayo 이 있죠.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소피아 왕비 미술관Centro de Arte Reina Sofia과 쁘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이 공원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것처럼 이 두 미술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차풀테펙 공원을 포함해서 이 지역 일대에서 반나절 이상을 보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거죠.

모던아트 미술관 안에는 멕시코 모던아트 작품들이 상설전시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간입니다.  마침 제가 갔을 때 운 좋게도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08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시었던 것 같은데 운 좋게 맞닥드린 거죠. 사실 멕시코시티에 도착하기 전에 머물었던 오아하까Oaxaca나 메리다Merida 등지에서 접했던 루피노 타마요에 너무 반해서 루피노 타마요 컨템퍼러리 미술관에 더 큰 기대를 갖었었는데, 루피노 타마요의 작품은 그곳에 한 점도 없더군요. (모던아트 미술관엔 몇 점 있었습니다.) 아마도 루피노 타마요 재단 같은 데서 운영하는 현대미술 상설전시를 주로 하는 것 같더군요. 음향효과까지도 전시품에 속할만큼 특이한 미술작품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Bus Turistica 라는 2층짜리 시내 투어 버스를 타는 겁니다. 주말에는 차가 많이 막히기 때문에 오래 걸리긴 하지만 평일이나 아침에는 괜찮더군요. 미술관 사이를 오가다보면 차풀테펙 공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데, 탈 것이 있는 놀이공원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과천경마공원이나 어린이대공원 같이 가족단위로 놀러가는 분위기의 유원지쯤 될 것 같네요. 워낙 나무들이 우거져서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재밌는 구겅꺼리들이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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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르마 도로 양편 인도에 길게 늘어선 미술복제품들. 레메디오스 바로의 그림이 보인다.


공원 속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한참 따라가면 나타나는 루피노 타마요 컨템퍼러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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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Cuba2009. 4. 4. 03:52
취향에 따른 기호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쿠바에서 여행자가 가져올만한 기념품이 어떤 게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단 꽤 많네요. 아래 나열하는 기념품들의 대부분은 Mixta 라는 간판을 내건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념품샵에서 거진 다 구해집니다. 그곳에는 CD 나 옷, 볼펜따위들까지 가게의 규모에 따라 꽤 다양한 품목의 기념품들을 팔고 있죠.

Cigar & Rum
많은 사람들이 쿠바에서는 씨가를 사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워낙에 질 좋기로 유명한 쿠바의 특산품이니까요. 그런데 그 말은 전세계 어디서나 쿠바 씨가를 구할 수 있을꺼란 예측을 할만큼의 인기를 말해주는 거 아닐까요? 스위스 시계를 스위스에 가서만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듯 말이죠. 그런데 스위스 시계는 스위스가 더 쌀지 모르겠지만 씨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쿠바를 여행하는 중에 피울지언정 바리바리 사느라 애쓸 필요는 없다는 거죠.

쿠바에서는 길거리에 구걸하는 거지들도 씨가를 물고 있습니다. 그만큼 너무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씨가들 중에는 가짜가 많아서 길에서 속아 살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일부러 정부에서 운영하는 상점이나 씨가공장 또는 공항면세점에서 사면 그 가격이 결코 다른 나라 공항면세점에서보다 매력적으로 싸거나 하질 않게 되죠. 더군다나 쿠바에 들어갈 수 있는 창구 역할을 몇 안되는 나라들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허용하는 반입량이 제한되어있습니다.  제가 창구로 삼았던 멕시코의 경우 20가치 이상은 세관의 통제를 받습니다. 그리고 씨가 때문에 입국심사가 상당히 지연될정도로 까칠하게 검사하므로 어물쩡 넘어갈꺼라고 생각해서도 안되죠. 따라서 그다지 많이 사오지도 못할 꺼면서 비싸기까지 한 씨가는 기념품으로써 그다지 매력이 없어보인다는 결론입니다.

그대신 럼주를 사는 게 어떨까요. Havana club 이라는 럼주는 쿠바인들에게 로망과도 같은 술입니다. 한 두 병 사오면 돌아와서도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기 좋겠죠. 독해서 한꺼번에 마실 일도 절대 없을테니까 오랜 추억꺼리가 될 겁니다.


체 게바라 스와치 시계
swatch Che Guevara memorial

제가 쿠바에 들어가기 전, 아마 론리플래닛을 통해서였던 것 같은데, 체 게바라Che Guevara 를 기념하기 위해서 스와치Swatch에서 만든 시계를 쿠바 공항면세점에서만 구할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쿠바에서 나올 때 호세 마르띠Jose Marti 공항에서 묻고 물어서 찾았죠. 하지만 막상 찾아냈을 땐 그다지 취향에 맞지 않아 사지는 않았습니다.

다녀와서 찾아보니 쿠바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가격이 쿠바에서 살 수 있는 가격보다 두 배 가깝게 비쌌죠. 호세 마르띠 공항 면세점 시계파는 곳에서 밖에 진열해놓고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고는 찾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쭈볏쭈볏 눈치보며 어물쩡거리다가 눈에 안 띈다고 포기하진 맙시다.


게바라 3페소 동전
체 게바라는 쿠바의 아이콘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당선 직후부터 전임자들을 묵사발 만들어놓곤 하는 걸 생각해보면, 카스트로가 죽은 체 게바라를 자국민들이 우러르도록 놔두거나 장려하기까지 하는 건 참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정말로 "쿠바 = 게바라" 랄 수 있겠더군요. 그러다보니 각종 체 게바라 관련 기념품들이 즐비한데요, 그중에 특이하게 팔리는 물건이 바로 체 게바라 3페소 동전입니다.

사실 이 동전은 CUP(Peso Cubano)의 3페소로 길거리 아이스크림 하나 간신히 사먹는 돈입니다. 그런데 보통 관광객들은 환전용 CUC(Peso Convertible) 를 사용하기 때문에 CUP를 구경할 일이 거의 없죠. 그러다보니 체 게바라가 세겨진 3페소 동전을 물건을 사면서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점을 이용해서 행상들이 관광객들을 붙잡고서 체 게바라 기념주화라면서 비싸게 팔러 다니는데 혹시 그들이 부르는 대로 1CUC 에 샀다면 실제 가치의 약 8배 비싸게 사는 샘이 됩니다.

3페소 CUP 동전을 만나려면 쿠바의 구석구석을 돌면서 돈 쓰는 일에도 적응이 될만큼 여행 일정에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냥 길 위에서 속는다는 걸 알고라도 하나쯤 사오는 것도 괜찮겠죠. CUP 를 쓸 줄 알게 된다 해도 여기저기 거스름돈 받으러 다니면서 3페소 동전을 만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테니까요. 사실 현지인들의 상거래에서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동전은 아닙니다.


야구 베트
지난 WBC와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못 냈지만 쿠바는 아마추어 야구의 세계 최강입니다. 프로팀이 없기 때문에 아마추어야구 최강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그냥 세계최강이라 해도 딱히 뭐랄 사람도 없겠죠. 워냑 야구가 유명하고 국민운동이다보니 야구 베트를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팝니다. 물론 실제 경기에 사용되는 크기의 나무 베트도 있지만 그보다는 빨래방망이만한 크기의 한 손으로 들고다닐 수 있는 야구 베트에 "Cuba" 라고 써있는 걸 기념품으로 내놓죠. 꽤 귀엽기 때문에 미국사람들은 잘들 사더군요. 여자분들은 사서 여행 중 호신용으로 써도 괜찮겠습니다.


초콜릿
유명 카카오 생산국이 아닌 쿠바가 초콜릿으로 잘 알려진 건 아닙니다. 그것보다 초콜릿 생산으로 유명했던 아즈텍 문명이 바로 옆에 있었고, 그 아즈텍 문명을 파괴한 스페인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노동력으로 수용했던 땅이 쿠바다보니 아즈텍 문명인들과 피도 섞이지 않은 그들에게 자연스레 전통적인 초콜릿 생산법이 남게 된 거죠. 그래서 수도 아바나에는 Museo del Chocolate 라는 초콜릿 까페도 있고 공항에서도 생 초롤릿을 파는 가게가 두 세 군데 있습니다. 초콜릿 구매의 한가지 팁이라면 공항에서 쓰고 남은CUC 화폐로 생초콜릿을 사먹는 겁니다. 그런 관광객들이 저 말고도 꽤 많았던지 여러 단위의 동전 조합으로 사먹을 수 있는 초콜릿을 낱개로 팝니다. 쿠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쁜 포장도 해주더군요. 비행기 타기 전에 뜯어서 다 먹어버렸지만...


엽서
쿠바에서 체 게바라가 그려진 엽서를 써서 집으로 보내면 그것도 괜찮은 기념품이 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죠.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엽서에 쿠바 우표를 붙이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주국으로 우편물을 보내는 일이니까요. 엽서는 기념품 가게에서 쉽게 구해집니다. 우표는 각지의 우체국에서 구할 수 있지만 엽서보다는 좀 어렵죠. 혹시 돌아나올 때 공항에서 짜친 CUC 화폐가 남았다면 엽서와 우표를 그곳에서 사서 보내는 것도 시간 절약하는 팁이랄 수 있겠습니다.

아바나의 호세마르띠Jose Marti 공항에서 면세점은 어느 공항이나 다 그렇듯 공항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나옵니다. 공항검색대 창구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곳을 나서면 오른쪽에 럼주나 씨가 등을 파는 좀 그럴듯한 면세점이 일단 하나 보이고, 그 맞은편에 매대를 설치해놓고 기념우표나 책갈피 등을 파는 곳들이 늘어서있죠. 물어보면 기념우표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우표도 파는데 국제우편을 위해서 얼마짜리를 붙여야 하는지 물어보면 됩니다. 공항검색대 출구 통로 방향을 따라 조금 더 지나면 넓은 대기실이 보이기 직전 왼쪽에 화장실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그곳 벽면에 우체통이 붙박이로 설치되어있죠. 엽서는 거기 넣으면 됩니다. 과연 갈까 의심이 가긴 했지만 실제 오긴 오더군요. 두 달 넘게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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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2009. 2. 1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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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arez Quintero거리의 Cafe Catunambu

작은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진한 쪼꼴라떼Chocolate와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츄로스Churros 인 것 같습니다. 퐁듀 따위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면 딸기나 바나나, 혹은 아이스크림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기호 같은 거겠죠.

쪼꼴라떼와 츄로스는 적어도 스페인어에서 한 단어로 읽어야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쪼꼴라떼 이 츄로스'(Chocolate Y Churros) 라고 한 번에 발음하는 거죠. 쪼꼴라떼는 츄로스를 찍어먹는 소스라고 여겨질만큼 이 둘은 붙어다니는 음식입니다. '핫도그와 케챱' 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항상 핫도그엔 케챱이 발라져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씨리얼' 하면 당연히 우유에 말아져 있는 걸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 말에서 쪼꼴라떼는 영어에서처럼 느끼하게 '촤커릿' 하지 말고 원색적으로 아주 찐하게 '쪼꼴라떼' 라고 해야 그 맛에 더 어울리는 진한 느낌이 들고, 뒤에 '츄로스' 역시도 단 맛 때문에 입 안에서 흥건히 고였던 침을 걸쭉하고 길쭉하게 떨어뜨릴 것처럼 발음해야 그 맛이 느껴질 것만 같네요.


물론 몇 번 먹어보지도 못한 여행자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서투른 감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 이젠 길에서도 흔히 파는 바나나를 못 먹어본 동네 아이들 앞에서 어쩌다 한 개쯤 먹어본 바나나의 황홀한 맛을 침흘려가며 설명하는 꼴입니다. 더욱이 '쪼꼬라떼 이 츄로스'가 이미 생활 문화의 일부인 스페인이나 멕시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아주 흔해진 바나나에 아무런 신비감도 없는 지금의 아이들에게 바나나 이야길 하는 격일 수도 있겠고요. 물론 그들이 이 글을 읽을 리는 없지만. 하지만 어딜 가나 잠깐동안의 훌륭한 휴식을 주는 이 간식꺼리는 익숙해져서 지루해지거나 흔하디 흔한 재미 없는 것이 되버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스페인어 선생님이었던 바로셀로나 출신의 따이스Thais와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쪼꼬라떼 이 츄로스' 이야길 꺼냈을 때 그녀가 침을 꼴까닥 하고 삼키며 향수에 젖은 표정을 보여줬던 걸 보면 정말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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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선 어디에서나 쪼꼴라떼를 파는 곳에서 츄로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함께 묶어 파는 건 너무 당연하고 간단한 아침식사 대용으로도 먹곤 하죠. 밀가루 도우를 별모양의 사출기로 뽑아낸 후 튀겨서 겉에 설탕을 묻혀서 내는데 어찌보면 차라리 설탕 도우넛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스페인의 츄로스는 프랑스나 포르투갈 등의 인접국가에도 퍼졌고 미국이나 남미, 특히 케리비안 해에 인접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쿠바나 멕시코 등지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해본 멕시코의 츄로스는 우리나라의 계란빵이나 붕어빵처럼 가판대에서 팔거나 혹은 빵집에서 팔지만, 까페에서 파는 건 보질 못했습니다. 물론 있긴 하겠지만 쉽게 접해지지 않았던 건 그걸 대하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기는 한 거죠. 그리고 그곳에선 쪼꼴라떼와 츄로스가 서로 따라다니는 세트가 아닌 것도 차이점입니다. 멕시코의 츄로스는 안에 카라멜 시럽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영화극장에서 파는 카레멜 시럽이 들어있는 츄로스는 멕시코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단 맛을 위해 쪼꼴라떼에 찍어먹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인지 함께 세트로 파는 게 일반적이지도 않지요. 더욱이 쪼꼴라떼 하면 우유보다는 물에 타서 나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멕시코에서는 그것이 츄로스의 단 맛을 더해줄만큼 달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멕시코의 길거리 음식 같은 츄로스 보다는 까페의 의자에 앉아서 즐기는 휴식같은 스페인의 그것을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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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2009. 1. 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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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Gallos 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가장 유명한 플라맹고 공연 이름입니다. Gallo 는 영어로 tough guy, macho 등의 의미로 Los Gallos 는 '정렬적인 친구들' 정도로 보면 되잖을까 싶네요.

산타크루즈광장(Plaza de Santa Cruz)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 중 남서 방향의 모서리에서 입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단체손님들이 한꺼번에 뭉텅이로 표를 사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낮에 지나면서 표를 미리 예약하는 게 좋습니다. 또 예약하면서는 좌석지정이 되지 않는데, 단체손님의 경우 좌석을 지정해서 주기도 하므로 좋은 좌석을 차지하고 싶으면 공연시간보다 '최소한' 30분은 일찍가야 할껍니다.

산타크루즈 광장은 알카자르Alcazar 가는 길에 거치기 쉽기 때문에 한낮에 알카자르를 찾아가면서 표를 예약하고 또 길도 익힌 후에 밤에 공연 시작시간 1시간 전에 출발하는 길 권하고 싶네요.

공연입장료에 맥주Cerveza, 레드와인Vino Tinto, 상그리아sangria 셋 중 한 잔이 포함되어 있는데 절대로 레드와인은 피하세요. 상그리아는 본디 상한 와인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다니 상관 없지만, 정말 시고 떫은 레드와인이 나옵니다.
 
이 음악은 Vince Mendoza 가 지휘한 플라맹고 곡이긴 하지만 Los Gallos 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과는 다릅니다. 가수의 창법과 분위기가 닮았기 때문에 링크했네요.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India2008. 10. 20.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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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나오면서 천가방을 술집에 두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인도 여행중에 산 이후로 지금까지도 즐겨 들고다니는 천가방이었다.

"왕걸레 가져가셔야죠."

술집 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던 나를 뒤쫓아나온 여자 종업원이 그렇게 불러세웠다. 그녀에게 내 가방은 '왕걸레'로 보였나보다. 물건을 잊고 나온 쑥쓰러움과 그녀의 '왕걸레' 소리에 웃음이 났다. 그순간 트리베니 뮤직센터 생각이 났는데, 내가 거기서 봤던 파파그루의 가방 역시 처음엔 왕걸레로 보였던 탓이다. 지금의 내 것보다 훨씬 더 걸레에 가까웠던 그 가방이 탐이나서 결국 같은 걸 사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왕걸레'라는 표현이 기가 막히면서도 반가웠다.

바라나시에 머물던 중 하루는 파파그루가 매고 있던 천가방이 눈에 띄었다. 걸레같은 모습이었지만 묘한 매력을 느꼈기에 결국 파파그루에게 어디서 샀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의 짧막한 대답은 알아듣기에 아리송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다시 질문했는데 그제서야 아들 레디시를 불러 뭐라고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레디시는 나중에 자기 딸을 따라가보라고 통역하듯 알려주었고, 결국 난 할아버지에게 질문하고 대답은 손녀에게서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다지 삼대를 기다려서 깨달아야 할만한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날의 시타르 레슨이 끝난 후 파파그루의 손녀딸은 나를 데리고 겐지스강 주변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쳐갔다. 그리고 어느새 우린 옷과 첫가방 만드는 상점에 도착했다. 그곳을 찾아가는 길에 나에게 한마디도 건내지 않은 채 그저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뒤를 돌아봄으로써 따르는 나를 인도하던 그아이는, 상점 주인에게 뭐라고 몇마디 말하곤 돌아서더니 나에게는 내가 찾는 곳이 여기라는 눈짓만을 남기고서 돌아서려고 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삼대를 기다렸음에도, 결국 현자를 만나게 해줬으니 또다시 깨달음을 빌어보라는 거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우린 그렇게 통했다.

난 그 깜찍한 아이에게 주머니에서 5루피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인도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도움으로 응당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의 길안내 심부름이 무척 기특하고 똘똘해보였던 이유가 더 컸다. 다시 말해 그건 댓가성이라기보단 나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아이는 싫다는 손짓을 하더니 내가 다시 권할 틈도 주지 않고 망설임 없이 나를 지나쳐 돌아가버렸다.

그순간은 나에게 정말 충격이었다. 주는 돈을 받지 않는 것도 낯설었거니와, 인도에서 처음으로 댓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을 받았기 때문일 거다. 같은 날 오전에 트리베니를 찾아가던 길을 헤매다 (그곳을 찾아갈 때마다 헤맸다. 물론 돌아올 때도 헤맸다.) 우연히 만났던 여자아이와도 대조되어 더욱 그랬다. 그 아이는 자기 사진을 찍으라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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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불러 세우고는 옆에 묶여있던 염소를 끌어안고 포즈를 취하더니 결국 내가 예상했던 바대로 돈을 달라고 했었다. 인도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그런 식이다. 귀찮게 따라다니며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달라고 조르거나 내가 바라지도 않은 친절을 쏟아내고는 결국에 가서 손을 내밀곤 하는 꼬마아이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둘러쌓이다시피하여 길을 거닐다보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게 되는 일조차 피곤함으로 다가올 때가 생긴다. 그런 피곤함도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때 별다를 게 없어보이는 여자아이 하나에게서 느꼈던 게 바로 휴식같은 친절이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그 트리베니의 소녀가 머뭇거림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을 때 나는 멍해져버렸다.

그리고 그건 이 왕걸레스러운 천가방이 아직도 내게 소중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술집 종업원의 '왕걸레'라는 장난스런 부름에도 난 기분 상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친절'에 감사할 뿐이다. 물론 그녀가 부르지 않았더라도 바로 찾으러 들어갔겠지만.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