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 Little White Book2014. 12. 5. 17:01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김사인님의 낭독으로 처음 듣게 된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 입니다. 그의 낭독을 두 번을 듣고서 한번을 읽었는데, 세번 모두 다 뭉클해졌습니다. 그러고서 이 시가 1968년에 씌어진 시라는 걸 알고, 그 시대에 이런 풍경을 꿈꾸다가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이 그가 살았던 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서도 그와 같은 평화에 대한 염원을 그대로 공감할 수 있는 나와 만나지면서, 그 시절 그에 대한 연민이 나에게 이입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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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Little White Book2010. 8. 13. 14:13
나이 들어서는 더 많은 소설들에 더 풍부하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문득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라는 책을 읽은지 10년도 더 지났다. 그런데 당시에 그책이 이야기에 대한 흥미 말고 문장들에 담겨있는 생각으로 나를 공감시키지 못하고 지나갔던 건, 작가가 당시 나의 경험을 앞서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다시 말해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생각을 공감한다는 건 쉬운 일도 아닐 뿐더러, 그런 건 그냥 놓쳐버리기도 쉽다.

이제서 발견하길, 그 책에는 지나간 사랑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적혀있었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랑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나이가 더 들 수록 앞서 경험했던 사람들의 생각들에 대한 걸음망도 더 촘촘해질 거다.

아마 많은 아픔들을 동반하면서.

한참 아플 때 잠들어버리거나 놓아버리고 싶다고 징징대는 건 단지 아파서 그랬을 뿐,

그 아픔들에 단련되거나 무뎌지지 않고 계속 아팠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영원하길 바랬던 것처럼, 끝난 사랑이라도 계속 아팠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남의 이야기처럼 발견한들 그게 절실하게 다가올만큼, 그게 사랑이었건 다른 무엇이었건.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10. 1. 17. 00:44
나는야 세컨드1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번째,
첫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밑줄은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표시해놓은 것으로 본디 시에는 없는 낙서임.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9. 9. 25. 03:00
권지예의 첫번째 장편 '아름다운 지옥' 만 빼고 그녀의 다른 책들은 모두 읽었기 때문에 권지예 작가의 두번째 장편이자 내게는 그녀의 첫번째 장편인 '붉은 비단보'는 그 자체로써도 낯선 경험이었다. 그것 말고도 이 책에는 몇가지 낯설음이 더 있는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역사 속의 특정 인물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권지예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녀는 일단 한국적인 것에 낯선 사람이고 (한국사람이 한국적이지 않다는 것보다 토속적인 것보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인 성격이 어울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하물며 그 옛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이야기라니...) 더구나 그런 어색해보이는 소재를 다루기 위해 사용한 어휘들도 그녀에게 낯설었다. 아마도 권지예 스스로도 그런 낯설음을 좁히고자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꺼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조선시대의 예술가적 자아를 갖은 세 명의 여인들,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을 모델로 삼고 그들의 특징과 에피소드들을 역어넣은 것은 소설의 내용이 상투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곳에 다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을 동시대 인물로 역어낸다던지 상호간의 관계적 장치들이나 소재들에서 느낀 참신함이 더 컸다. 그렇기에 옛 전설이나 역사속 인물을 중심 소재로한, 심심찮게 나오는 그런 소설들과 구별되는 특색도 갖고 있다.

서사가 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읽지 않고 지나가는 문장이나 문단들도 있었다. 다음을 예측하기 쉽다는 것이 되려 의외성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기대는 필요 없을 정도다. 항아와 서로 사랑했던 준서가 사실은 죽지 않았고, 또 그가 죽지 않았음에도 죽은 걸로 항아에게 알려지게 된 사연도 어떻게 된 일인지 뻔히 보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들 속에서 곳곳의 묘사가 상당히 감각적이다. 그래서 읽기에 즐거운 글이었고 되도록 띄어넘지 않고 읽게 만들었다.

계연성 없는 사건들이 불편했다. 빈이가 금강산으로 떠나는 이유가 빈약했고, 죽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작품들 중 남길 걸 정리하고 없앨 껄 없애려는 항아 또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이 현실 속에 남겨져있는 신사임당의 작품들과 그 숫자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항아보다 먼저간 가연이 또한 그녀의 작품들을 죽기 직전에 정리하고 없애버리는 공통적인 행동 패턴을 그려내어 항아의 행동이 약간은 자연스럽게 보이게 했을 뿐이다.

예술적 자아를 억압 받을 수밖에 없었던 옛 시간 속 여인들을 그리면서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지 말고 그냥 보여주기만 했으면 어땠을까. 항아와 초롱을 비교하고, 가연과 항아를 비교한다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삶에 대해 작가가 항아의 생각이라는 형식을 빌려 의미를 부여해준다던지 어떤 해설을 하면서 개입하려는 것들이 어색했다.

구성에 있어서도 의아한 부분이 있다. 항아의 죽음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되는데 바로 그다음 부터는 항아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그녀의 오십 년 평생을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항아의 죽음을 궂이 앞에 짧막하게 배치한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그냥 시간 순서대로 서술했다면 너무 단조로운 느낌이 있을 것 같긴 하다. 아마 그걸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거다. 영화 속에서는 이런 식의 구성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일반적이기도 하고, 그럴 때 사람의 시각의 도움으로 맨 앞과 맨 뒤의 장면 연결이 더 자연스럽긴 하다. 과연 소설에서도 그만큼의 효과를 준 구성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소설 주제를 생각했을 항아라는 인물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정리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그런 구성이 약간의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너무 흔하고 단순히 장면 오려붙이기의 편집적인 구성이기도 하다.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9. 2. 14. 16:20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입니다. 그리고 어제, MBC 의 W 라는 프로그램에서 달콤한 초콜릿에 숨겨진진 핏빛 카카오의 비극 이란 꼭지를 보았죠. 서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에서 초콜릿을 먹어본 적도 없는 노동자들이 재배한 피땀어린 카카오 열매에 대한 이야기었죠. 우리가 초콜릿의 달콤함만을 떠올리는 발렌타인데이에 앞서 이런 내용을 방송하며 또다른 세계 속에서는 초콜릿에 달콤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보도하는 시기적 기획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꼭지의 방송맨트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마디가 있었는데, 바로 "초콜릿의 달콤 쌉싸름함" 이란 말이죠.

"달콤 쌉싸름한 초컬릿" 이란 말은 방송의 내용을 함축하는 말이면서도 사실은 우리가 "달콤 쌉싸름한 초컬릿"으로 알고 있는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또는 그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말일 겁니다. W 의 작가는 그 소설의 제목에서 맨트를 빌어오면서 그 짧은 맨트 안에 상당히 깊은 의미를 새겨넣은 거죠, 은근하게. 정말 박수쳐주고 싶습니다.

이 소설의 원제목은 '초콜릿을 끓이는 물처럼Como agua para chocolate' 입니다. 우리에겐 잘 와닿지 않는 말인데, 초콜릿을 끓인다는 말이 낯설기도 하고 그런 표현이 갖는 정서적 배경도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번한 제목이 엉뚱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 된 것 같습니다. 소설의 내용을 보나 초콜릿의 달콤함 이면에 숨겨진 코트디부아르 노동자들의 애환을 떠올리면, 번한된 제목은 상당히 잘 된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처음 제가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번한 제목에 잘못이 있을 꺼라는 의심을 했었죠. '초콜릿을 끓이는 물처럼' 이란 말이 소설 속에서 주제를 드러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런 중요한 말에 묻어있는 어떤 정서적인 공감대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란 제목으로 번한되면서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부분에 대한 의문 때문에 혹시 번한된 소설에 오역이 있잖을까 싶어 스페인어로 된 소설책을 사서 비교까지 했습니다만 오역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런 의문에 대해 제가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번한된 제목은 소설 내용의 열쇠가 되는 정서에 대한 생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보충설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번한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컬릿' 과 스페인 원서 'Como Agua Para Chocolate'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탕과자 초콜릿 보다 먼저 쪼꼴라떼 라는 음료가 중남미의 아즈텍 문명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전편인 Chocolate (1) 에서 다뤘던 내용인데, 그 내용을 요약, 보충하면서 chocolate 란 말에서 비롯된 오해를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초콜릿'이란 말은 영어의 'chocolate' 에서 왔지만 영어의 'chocolate' 은 스페인어의 철자가 같은 말 'chocolate'(쪼꼴라떼) 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어의 '쪼꼴라떼' 또한 스페인이 아닌 멕시코 중부 나홧 지방의 언어 'Xocolatl'(소콜랏) 에서 만들어진 말이고, 소콜랏은 Xocolli + Atl 의 합성어로 각각의 단어는 나홧어에서 '쓴 맛'과 '물'을 의미하므로 결국 쪼꼴라떼의 오리지널 의미는 '쓴 맛의 물' 입니다. 소콜랏은 쓰기만한 게 아니라 매운 맛도 나는 음료였다니 절대 소콜랏이 달콤할 꺼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죠. 물론 근원을 생각했을 때 아즈텍 문명 사람들이 마시던 음료가 그렇다는 거고 멕시코 사람들의 쪼꼴라떼는 달콤한 것이 맞습니다. 단지 쪼꼴라떼가 물에 타마시는 음료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고, 지금도 멕시코에선 물에 타마시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우린 여러가지 오해를 가지고 있죠. 그 첫번째로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발달한 가공법으로 만들어진 사탕과자 chocolate 이 영어식 독법인 '초콜릿'과 함께 받아들여져 '초콜릿은 사탕과자다' 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다음은 스페인어로 읽었을 때의 chocolate 에서 '-late'(라떼) 가 이테리어의 우유(latte라떼)일 거라는 언어적 착각을 불러일으켜 쪼꼴라떼를 '초콜릿 우유음료' 라고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정확히 하자면 이테리어로 '초콜릿우유' 는 'latte al cioccolato', 스페인어로는 'chocolate con leche', 영어로는 'chocolate milk' 입니다.) 기실 스페인에서 쪼꼴라떼는 '우유 음료' 가 맞지만, 그건 멕시코를 식민지로 했던 스페인이 멕시코의 Xocolatl 을 자기들 나라로 가져가면서 우유음료로 만들었던 것이므로 이또한 스페인문화를 중심으로 한 '쪼꼴라떼는 우유 음료다' 라는 오해를 만듭니다. 더욱이 멕시코에서 우유를 마신 역사가 스페인의 식민통치 이후라는 걸 생각했을 때 멕시코의 쪼꼴라떼는 물에 타마시는 음료가 맞습니다.

다시 소설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제 우린 앞서 제가 잘 못 적었던 '초코릿을 끓이는 물처럼' 을 일단 '쪼꼴라떼를 끓이는 물처럼' 으로 고쳐쓰자는 데 이견이 없어야 하고, 또 그 제목이 우유음료 쪼꼴라떼가 아닌 '쓴 맛의 물' 인 '소콜랏' 또는 물에 타마시는 멕시코의 쪼꼴라떼에서 정서적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걸 생각할 수 있어야겠죠. 그러고나면 '쪼꼴라떼를 끓이는 물처럼' 이란 제목의 정서적 배경에 훨씬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멕시코의 쪼꼴라떼 음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카카오 열매에서 가공된 카카오 고형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카카오는 카카오 고형과 카카오 버터로 가공되는데, 산업혁명 이전에 카카오 버터를 굳혀서 사탕과자로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있질 못했죠. 그리고 그 카카오 고형은 우리가 흔히 마시는 '마일로'나 '네스퀵'처럼 그냥 적당히 뜨거운 물에 타마실 수 있는 게 아니라 팔팔 끓는 물이어야지만 녹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쪼꼴라떼를 끓이는 물' 은 적당히 뜨거운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극한의 상태를 이르는 의미인 거죠.

'Como agua para chocolate' 는 에스끼벨이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본디 스페인어의 관용어구로써 열정이나 성적 흥분 상태와 같은 달콤함을 의미하면서도 극한의 끓어오르는 광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용어구는 앞서 길게 설명했드시 스페인어의 정서라기보다 소콜라 음료를 마시던 멕시코의 고유정서를 바탕으로 생겨난 말이겠죠. 에스끼벨은 바로 그러한 정서를 빌려온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를 이해하면서 언어적 지역적 배경을 파고 들었지만 이해하고나면 지역이나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단 걸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단 맛과 쓴 맛을 경험해봤기 때문이죠. 그러고보니 영어에도 비슷하게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이율배반적 의미로 bittersweet 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유의 말로는 어떤 게 적당할까요? 혹시 맛도 있지만 뜨거워서 고통스럽기도 한 '뜨거운 감자'? 그럼 번한 제목을 '뜨거운 감자' 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역시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8. 10. 24. 15:56
일단 칭찬부터 하고 시작하자. 그것이 책 내용과는 크게 상관 없기 때문에 깔끔하게 칭찬부터하고, 욕은 뒤에 하는 게 좋겠다. 나는 번역서를 잘 읽지 않는다. 그 이유중 하나가 문체인데, 이책의 역자인 맹보용이 번역한 책이라면 읽을만도 하겠다 싶어졌다. 단지 일본어가 어순이 같고 정서적으로 닮은 면이 있어 매끄러운 번역이 된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쉽표 하나도 친숙한 우리말의 그것으로 찍혀있는 것이 대단히 쉽게 읽히는 번역이 되어 반가웠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이 장편인척하는 중편스러운 소설을 읽다가 던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책을 골라들은 것은 소재 때문이었다. '여행'이란 범위 넓은 소재의 틀에서 그 배경이 여행자들의 게스트하우스였다는 점이 무척 끌렸다.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여행에 얽매여 있는 여행자들이 다음 여행을 꿈꾸면서 지내는 곳이 바로 도쿄 게스트하우스라는 기대를 갖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실제로 그런 공간이 있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상상해왔던 나의 막연한 개인적 바램이나 기대감과 합해진 지레짐작이었을 뿐이지, 내용을 읽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곳은 서로 교차 섹스를 즐기거나 성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일 뿐이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에서 돌아왔음에도 지난 여행에 갖혀 있는 것이기보다,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나약함 때문에 그 공간은 그들에게 도피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도피성 공간에서 또다른 무책임한 도피가 이뤄지고(주인인 쿠레바야가 집을 팽개치고 도망 간다), 그것을 개기로 주인공은 자신의 애인이었던 마키코에 대해 똑같은 짓을 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걸로 소설이 끝나버린다. 정말 이렇다할 사건도 없이 말이다.

번역서를 좋아하지 않다보니 일본소설 또한 몇 권 읽어보질 않았지만, 주류를 이루는 것들은 대략 이렇다고 나는 짐작한다. 내용보다 장면이 좋은 영화 같고, TV 이미지 광고 같은 애매함과 여운으로 포장된 것. 그에 비하면 우리 소설들은 누더기와 같다는 느낌이다. 일본 소설은 격식을 차려입는 정장이 불편한 독자들에게 케쥬얼한 코디로 부담을 주지 않는 옷과 같다면, 우리 소설들은 정장의 불편함보다 더한 누더기의 초라함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인간들의 고뇌까지 깊히 내려간다. 그저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비유일 뿐이지만, 이 책에는 소설을 쓰게 된 배경적 문제의식 따위도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감성을 갖고 있다고 하기엔 그것이 너무나 얇팍하다. 그나마 내가 여행을 좋아하기에 이정도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었을 때도 감동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을까? 그렇게 일반적인 정서를 움직이는 소설일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작가는 그런 걸 기대하고 있지도 않고 독자를 그렇게 만들 능력도 없잖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행가이드 책은 실용서라는 특성상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찾아서 읽게되는 것처럼, 역으로 이 소설은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찾는 여행 후기 같은 느낌이다. 만약 어떤 여행가이드북이 있어서 여행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사람조차 여행을 꿈꾸게 만든다면 그게 바로 훌륭한 소설 한 편일 거다. 이런 소설은 거기 미치지도 못할 뿐더러 가이드북의 역할도 하지 않는다. 소설 속 '여행제왕'이 다른 여행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급기야 쿠레바야를 가출하게 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여행제왕'은 이 책의 작가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8. 10. 14. 19:50
지난번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을 읽고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이 흥미를 끌던 초반에 비해 중반 이후부터 지루하게 끌고 나가더니 결말 부분에서 너무 많은 걸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끝내버린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 장편 '밤은 노래한다' 에서 역시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번엔 결말의 내용에 대한 실망감까지 안겨줬다.

마지막에서 김해연이 최도식을 죽이지 않는 건 납득이 되질 않는다. 차라리 다시는 만나지 못했거나 했더라면 그나마 개연성을 해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 김해연이 잘나가는 만철 직원이라는 양지의 신분에서, 민생단 사건에 휘말려 밤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최도식을, 한 번 죽이려고 찾아갔다가 실패했던 그를, 다시 만나게 했다. 그런데 그저 오래전 편지를 전해줬던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헤어지게 한다는 건 지독히 억지스럽다. 물론 '작가의 말'을 통해서 왜 그런 결말을 지었는지를 이해도, 공감도 했지만 그건 작가를 이해했을 뿐 작품을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독자와 이야기해야 한다.

분명 주인공이 최도식을 찾아갔다면 그를 죽이러 갔어야 했음에도 되려 고맙다고 말하고 그자리를 벗어난다는 건 어색하다. 더구나 독자가 최도식에 대한 복수의 순간을 목격하며 마지막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데서 작가 또한 그걸 의도했음이 뻔히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억지 매듭을 지었다는 건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한가지 더 실망스러운 건 작가 역시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듯,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최도식의 아이들을 만나게 하므로써 김해연이 살의(殺意)의 마음을 접게 만드는 장치로 보여지도록 했다는 거다. 게다가 용의주도하게도 그 앞부분에서, 김해연은 겁먹은 여자 아이의 울음 소릴 뒤로 한 채 방금 전까지 총으로 그 아이의 부모를 위협하던 스스로를 미워하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순수한 어린아이'란 장치에 대한 개연성을 갖추게 까지 했다.

그런 결말로 하마터면 실망을 안고서 책을 덮을 뻔 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고 짜릿한 감동에 전율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다. 그 감동은 바로 1941년을 살고 있던 김해연이 최도식을 죽이지 않고서 헤어진 직후, 그가 1932년에 이정희가 죽기 전 최도식을 통해 그에게 보낸 편지를 꺼내면서 시작된다.
(전략)
그걸 알겠어요.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러기에 말했잖아요.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당신과 그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때, 이 세상은 막 태어났고,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평안 속으로 나는 막 들어가고 있다고.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김해연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이미 혁명가의 길을 걷고 있었던 이정희는 죽음을 앞둔 채 사랑 앞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정희를 잃고 나서 이정희의 뒤를 따라가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을 격게 되는 김해연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던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시간의 문제였을 뿐. (중략) 하지만 여전히 과연 누가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먼저 죽었다고 해서, 혹은 나중에 죽었다고 해서 그가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결국 그들은 다 죽었으니까.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 있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면,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라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그것을 더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정희와,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삶과 죽음에 어떤 의미를 두지 않고서 이토록 하찮게 여기게 되는 김해연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더욱더 멀리 갈라놓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위 인용문 중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 라는 표현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다. 이 얼마나 간결하면서 그 길이보다 훨씬 많은 이야길 담은 문장이란 말인가.)

그리고 더불어 한가지 더. 대체 김연수 작가는 몇번이나 사랑을 해봤기에 지금까지의 작품 속 많은 사랑들을 저마다 다르게, 그리고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사랑을 하면서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정희의 편지도 그랬지만, 여옥과 김해연이 사랑을 나누게 되는 장면에서의 그 시각적 긴장감이란... 어찌나 사랑이 많은 작가인지 심지어 '사람'이란 단어가 '사랑'이라고 씌어진 오자도 발견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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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Little White Book2008. 9. 30. 08:19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으로 떠올린 게 위에 인용한 카프카의 '변신'이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내 자신이 벌레가 되어있는 듯한 느낌에, 딱지를 등에 덮고서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한마리 해충이 되어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근준비의 분주함 속에서도 여기저기 급하게 뒤져서 '변신' 책을 찾아들고 나왔다. 난대없이 벌레가 되었다고 시작되는 이 소설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벌레가 되었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보다 벌레가 된 기분으로 살아야 할 오늘이 나는 더 비참하다.

박성원의 많은 작품들과 장정일의 일부 작품들에서 왜 그런 뜬금없는, 좋게 말해서 판타지적 도입들이 씌어지고 있었는지도 더불어 이해가 됐다. 그냥 카프카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벌레가된 어느날을 경험해봤기 때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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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Little White Book2008. 7. 25. 11:30

1968년 4월이 시작되자마자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흑인 인권운동에서의 유일한 '비폭력'이 사라졌다는 걸 기념이라도 하듯 미국 전역은 흑인들의 광폭에 휩싸이게 되죠. 그러던 중 오클랜드에서는 블랙팬더당이 흑인 청년들의 폭동을 제지하고 있었고, 법규를 준수하며 냉정히 행동할 것을 충고하는 블랙팬더당 당원들은 흑인 청년들에게 우상시 되어가고 있을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경찰들의 폭동 진압 목적은 질서유지와 법준수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거죠. 조작으로 의심되는 경찰의 부상이 있었고 그로인해 18번가에 두 블럭이 차단되고 그곳에 숨어있다고 보고된 블랙팬더당 몇명을 잡기 위해 오클랜드의 경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군부대까지 출동하여 그곳에 수천발의 총알을 퍼부었습니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총알을 피해 건물 지하에 납짝하게 엎드려있던 블랙팬더당의 정보장관 엘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와 17세의 바비 허튼(Bobby Hutton)은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과 군 병력 한가운데로 걸어나가야만 했습니다. 클리버는 이미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몸에 불이 붙었다가 끈 상태로 발에는 파편이 밖혀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답니다.


이런 판단은 오랜 수감 생활 경험과 지속적으로 경찰을 관찰한 결과 나온 것이다. 그 결론은 이렇다. 모든 경찰은 동성애적이다. 동성애자는 벌거벗은 남성의 육체와 마주쳤을 때 몹시 놀라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육체를 애무하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오클랜드 경찰은 나에게 총격을 가하는 대신 내 벌거벗은 몸뚱어리를 차고 짓밟았다. 그런 환경에서 발로 차고 짓밟는 행위는 총격을 가하는 행위와 대조해 보았을 때 하나의 애무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극도로 흥분한 경찰 50여 명이 총을 들고 내 주위에 서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제정신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죽었을 것이다.
(엘드리지 클리버의 "Soul on ice" 중에서)

엘드리지 클리버는 "Soul on Ice" 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함께 있던 허튼에게 기대어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무장하지 않고 있다는 걸 경찰에게 보여주기 위해 허튼에게 알몸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었던 어린 허튼에겐 죽음의 공포 말고도 수치심이 남아있었고 그걸 옷으로 가려야만 했죠. 그래서 허튼은 사살되었고 클리버는 짓밟혔습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죽임을 당한 것에 비했을 때 짓밟힌 것을 '애무'에 비유한 것, 그리고 경찰들이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의 분노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책의 반어적인 제목만큼이나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 대목에서는 우리의 현 상황과 맞물려 공감대를 형성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경찰의 야만적 행위에 분노하면서 흑인은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경찰은 단지 결정권자들의 정책 수행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말이다. 경찰의 야만적 행위는 테러와 억압이라는 결정체의 한 면일 뿐이다. 경찰의 야만적 행위 이면에는 사회적 야만과 경제적 야만, 그리고 정치적 야만이 존재한다. 흑인의 시각에서는 이것이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엘드리지 클리버의 "Soul on ic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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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야만'은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경제적 야만은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고통을 뜻하는 걸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조장하는 '정치적 야만'에 의해 '경찰의 야만적 행위'를 당해야만 하는 흑인들에게 결국 그들이 사회 속에서 격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야만적 행위'들일 수밖에 없다는 클리버의 호소......


현재 우리가 총격을 받는 상황은 아니기에 ---과거에는 있었죠--- 저런 극단적 호소에 빗대어 말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정치/경제/사회적 야만이 경찰의 야만적 폭력으로 결정지어지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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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Little White Book2008. 7. 17. 13:54

김중혁의 첫번째 소설집 '팽귄 뉴스'는 저에게 약간 각별한 소통의 느낌을 안겨줬었습니다. 사실 소설의 내용으로 작가와 소통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느날 제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걸 본 어떤 사람이 제가 권해준 적도 없는데 책을 사서 읽고 다니는 걸 제가 우연히 목격했기 때문이죠. 저에겐 그게 각별한 소통의 설레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누군가에게 권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상대방을 가려가며 할 일이며 왠만해선 하지도 않는 행동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소개팅 상대로 만나게 할 수도 없는 거고, 상대방을 가려서 잘 맞을 것 같다 생각하고 소개해준다 한들 맺어지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말이죠. 물론 책 같은 것보다 더 쉬워진 게 사람 사귀기인 것 같을 때엔 이 어찌나 소심한 생각인가 라는 자책도 해봄직합니다. 반대로 사람만나기보단 책 읽는 게 쉬운 제가 상대방 역시 같은 걸 좋아할 꺼라고 기대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하는 이상 소심함을 면할 길이 없겠습니다만, 그 소심함 때문에 누군가 같은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 커다란 흥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게 저는 무척 좋습니다.

김중혁의 '팽귄 뉴스'를 상대방이 좋아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사람이 그 책을 읽으므로써 저와 소통을 시도하려했다는 것이 기뻤죠. 마치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로 해버리는 것보다 은근히 알려오거나 들켜버리는 호감의 마음 같은 설레는 느낌 말입니다.

얼마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따끈따끈한 김중혁의 새 책이 나왔기에 다녀와서 읽겠노라고 사놨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네요. 기왕이면 다 읽고나서 이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 에 대해 쓰고 싶지만 너무나 재밌게 읽고 있어 단편 세개만 읽고도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졌습니다. 이 책이 저를 흥분시키는 요소는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소설들이 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하기 쉽고, 두번째는 훌륭한 상상력으로 흥미를 놓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거죠. '매뉴얼 제너레이션' 같은 경우 매뉴얼을 통해 세상에 없었던 소통을 시도하는 내용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출근 길에 소음 차단을 위해 귀에 이어폰을 꼽아 놓고는 정작 음악을 재생하는 걸 잊은 채로도 아무런 소음도 듣지 못했을만큼...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아직 읽지 않은 단편 '무방향 버스'에 대한 기대감 입니다. 이 소설엔 '리믹스, [고아떤 뺑덕어멈]'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고아떤 뺑덕어멈'이 뭔지 아는 사람에겐 작가와의 소통 채널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죠.

이토록 신나게 읽고 있는 책이다보니 책을 덮고 나면 '팽귄 뉴스'를 다시 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오래전 꼽아놓았던 책갈피를 거기서 발견하게 된 것처럼 옛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사람은 '팽귄 뉴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나봅니다. 그사람이 엄청 눈물을 쏟았다던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을 읽던 제가 눈물은 한방울 만큼만 흘렸었기에(하품하느라) 그다지 억울한 마음은 없지만, 중요한 건 소통에 대한 설레임을 갖었다는 거죠. 그건 그사람에게도 있었을 꺼라고 생각하고나면 이별이 한쪽을 억울하게 만들거나 하진 않습니다. 지나고나서는 이별이란 말조차 어울릴 것 같지 않게 되버렸는데, 흔히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바로 그렇게 된다는 뜻이죠.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8. 5. 31. 12:55
일제 말기, 근대화되어가던 사회 속에서의 과도기적 시대상을 3대에 걸처 표현한 소설이 염상섭의 '삼대' 였다면, 여기 이번엔 남북분단의 전후 세대에 걸친 또다른 삼대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최인훈의 '광장', 그리고 박상연의 DMZ 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광장부터 시작하자. 이 소설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기실 잘 모르고 있다. 대입시험을 위해 짜여진 교과과정을 소화했던 사람이라면 본인이 소설 '광장'을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기 쉽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수학능력시험 지문에 나오는 이 소설의 결말 말고는 그 내용에 대해 아는 게 무엇인지. 시간이 오래 지나서 잘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으면서 낯익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우릴 만들어낸 교육이란 게 그랬는 걸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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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093/2000

2001년 문학과지성사에서, 2000년으로 출간 40주년이 된 '광장'의 2000부 한정 양장본을 펴냈을 때 위와같은 생각을 했었다. 일단 나부터가 광장의 결말 말고는 줄거리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생각을 계기로 '광장'이 세상에 나온지 40년만에 처음으로 그 소설을 접하게 됐다. 뒤에서 이야기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보다 늦게, 그리고 그 영화의 원작소설인 DMZ를 만나게 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DMZ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의 원작소설이다. 2000년 개봉 당시의 남북상황과 함께 엄청난 관심을 불러모았던 영화지만 그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더욱이 그 DMZ 마저도 바탕을 이룬 소설이 있으며 그 밑바탕이 바로 '광장' 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싶은 거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35세였던 젊은 작가의 시선의 폭으로 씌어졌다고 믿기 어려운, 그리고 너무도 잘 읽히는 문체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고 있는, 박상연의 유일한 작품인 DMZ는 분명 최인훈의 '광장'을 바탕으로 염상섭의 '삼대' 의 구도를 의식하고 씌어졌다. 8.15 해방 직후부터 6.25 한국전쟁까지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는 것이 '광장' 이라면, DMZ 는 한국전쟁 이후 휴전상태의 남북한의 이야기로 그 뒤를 이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두 소설이 서로 연결되는 3대의 구도란 이렇다. 

  • 一代 : 해방 후 이념의 문제로 자식을 버리고 월북한 아버지 이형도.
  • 二代 : 월북한 아버지와의 갈등과, 남북의 이념 모두에 대한 모순적 갈등 속에서 6.25 전쟁을 격고 제3국행을 선택하는 이명준.
  • 三代 : 남북전쟁 이후 제3국 브라질로 간 아버지에 대한 갈등을 안고서, 남북 대립상황이 나은 또다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중립국감독위 유엔군 자격으로 판문점에 파견된 베르사미.

'광장'에서 포로가 된 이명준은 제3국을 선택한 후 인도로 향하는 배에서 바다에 몸을 버린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소설이 혈연관계로써는 이어질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따져물을 수도 있겠고, 확실히 DMZ 의 베르사미는 이명준의 숨겨둔 자식도 아니다. 더욱이 베르사미의 아버지는 제3국으로써 인도가 아닌 브라질로 갔으며 여전히 생존해있다.

하지만 DMZ 는 그 3대를 혈연으로 묶지 않고서 더 큰 시각으로 연결해냈다는 것이 매력이다. DMZ 의 서두에는 제3국행 인민군 포로가 76명이었는데, 그중 인도로 갔다가 자취를 감춘 이연우란 사람이 베르사미의 아버지로 오해받는 상황이 나온다. 설사 그 이연우가 베르사미의 아버지가 아닐지라도 '광장'의 이명준과 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게다가 이념적 갈등과 분단상황이 낳은 자식이 제3국으로 향하던 이명준이라면, 같은 배 안에서 제3국을 향하던 사람들 중 그누가 이명준이 아닐 수 있을까. 설사 베르사미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연우의 자식은 아닐지라도, 분단상황이 만든 또다른 희생자의 아들 베르사미를 삼대째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앞선 두 세대에 대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깔고서, 그런 삼대째의 제3자이면서도 제3자일 수 없는 미묘한 타자의 시선으로 다시금 분단상황을 조명한 소설이 바로 DMZ인 것이다.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8. 2. 25. 12:11

제가 번역 소설을 즐기지 않는 이유는 문체나 문장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이나 상황 비유 같은 걸 언어적, 문화적인 차이로 느낄 수 없거나 번역되는 과정에서 감지하기 어렵게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소설가 박상우 선생님께서 이런 저의 생각을 듣고서 "독서법이 잘 못 되었다." 라고 일축해버리신 적이 있는데, 그일이 신경 씌어서 작품을 대할 때 너무 협소한 관점을 갖고 있잖나 하는 생각에 가끔씩 억지를 써서라도 번역서를 읽곤 하죠. 사실 번역서 중에도 읽고 싶은 책이 많은데 쉽게 손이 가진 않거든요.

그래서 약간 꺼려지면서도,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하게 된 책이 중국계 미국작가 하진(Ha Jin;진쉐페이)의 기다림(Waiting)입니다. 역시 5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을 읽는 내내 저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약간의 인내력을 갖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전개가 마치 영화의 진행을 보는 것 같아서 잘 읽히는 편이었죠. 반면 장면묘사들이 세밀한 편이고 전개가 느리기 때문에 약간 지루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이소설은 (중국계) 미국인 작가가 영어로 쓴 소설이지만 중국의 문화혁명시대의 지식층과 여성에 대해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조금 지루하게 전개되는 데 대해 아이러니컬한 결말부에서 약간의 보상이 있기도 합니다만, 너무나 직설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면서 독자의 생각까지 정리해주는 듯한 결말부가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읽은 작품에 대한 생각이란 걸 제가 느낀 거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정리해서 적자면 이런 겁니다.

"A 보다 B 를 더 사랑할 수는 있지만, 과연 B 는 내가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진심을 알 수 없다면 나를 안정시켜주는 가정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저도 옛날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A 보다 B 를 더 사랑하게 될 수는 있지만 언젠가 B 보다 더 사랑하는 C 를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A 를 떠나서 B 를 사랑하는 건 어쩌면 앞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될 C 에 대한 기다림을 선택하는 일인 건지도 모르죠. 이 소설은 그 부질없는 "기다림"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만나게 해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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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Little White Book2008. 1. 22. 00:13
이책은 에니메이션 같이 읽힌다. 마침 대부분의 사진들은 왼쪽 페이지에, 또 대부분의 글들은 오른쪽 페이지에 배치되어있어 책을 두껍게 휘어 잡고서 빠르게 페이지를 촤르르륵 넘기면 다까하시 아유무의 1년8개월간의 여정이 에니메이션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다까하시 아유무가 이 책에서 '레논' 하고 단 두 음절 썼을 때마다 내가 느끼던 공감은 기실 그가 아닌 레논이 만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행자들에게, 혹은 일상 속의 방랑자들에게 다까하시가 던져준 더 큰 공감의 책 속 이야기 하나는 바로 이것.


'좁고 뭐든지 있는 장소'에 있을 때는
길을 선택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넓고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있을 때는 그냥 걷기만 했다.

고르다 지치기보다, 걷다 지쳐 잠들고 싶다.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7. 9. 1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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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역 앞 광장


1박2일동안 페달을 굴러 찾아간 김천역. 김연수작가의 '뉴욕제과점' 에서는 '뉴욕제과점'이 김천역을 나서서 광장 좌측에 있다고 했지만 그곳에는 뉴욕제과점이었을 법한 곳이 없었습니다. 나무들과 주차장에 가려져있어서 더더욱 그런 곳에 꽤나 유명했다는 제과점이 있었을까하는 의심부터 들었죠. '뉴욕제과점'이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지만 어차피 소설에서의 '진실'은 '사실'이기보다 '사실인 것 같은 허구' 이므로 그것이 꼭 김천역 왼편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책에서처럼 24시 국밥집으로 바껴있지도 않을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허구였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서 김천역 앞으로 찾아간 것 자체가 바보짓이었을 수도있는 거죠. 비단 작가가 책 속에 쓴 내용이 허구가 아니었다 해도 작가가 국밥을 먹으며 씁쓸해했던 그 국밥집역시 지금은 다른 것으로 바꼈을 수도 있으니 찾지 못해도 실망하지 말자고 처음부터 마음먹어야 했습니다.

제가 찾아야하는 것이 '사실'인지 '진실' 또는 '허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닿는 한 한 번 찾아봐야겠기에 탐문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김연수작가의 소설을 통해 가지고 있는 단서는 단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상호가 뉴욕제과점으로 20여년 전에 꽤 유명했던 제과점이었다는 것과 그 이후 24시 국밥집으로 바뀌었다는 것. 거기다가 24시 국밥집이 현재 다른 걸로 업종을 바꿨을 수도 있다는 제 나름의 추측까지 보태서 단서는 세가지뿐이었죠.

먼저 김천역을 마주본 방향으로 광장 왼편에 있는 식당들을 봤습니다. 김밥집이 하나 있고 문을 닫은 크라운베이커리, 그리고 새거창식당부터 까치방 등의 이름을 갖은 깨끗한 간판으로 새단장한 국밥집들 네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어느곳 하나에도 24시라고 써있진 않더군요. 비록 작가가 말한 반대방향에 있었지만 작가가 24시 국밥집이라고 표현했음직한 걸 생각하면 그 네 식당들이 가장 유력했습니다. 식당으로 향해가다가 주차관리용 가판대에 앉아계시던 나이 지긋한 분께 제가 갖은 세가지 단서를 가지고 물어봤지만 모르시겠답니다.

네 식당들은 식당 문 앞에 종업원들이 호객하며 서있는 듯해보여서 접근하기 좀 꺼려졌고 다시 반대방향으로, 김연수작가가 말했던 광장의 왼쪽 방향으로 갔습니다. 싱글복어, 오성과한음, 서울식품 등이 있었는데 그 중 오성과한음은 문을 닫았더군요. 싱글복어와 김천역 사이에 경찰서가 하나 있었는데 혹시나해서 경찰서에 들어갔습니다. 또다시 세가지 단서를 가지고 물어봤죠. 경찰아저씨는 무척 친절하셨지만 역시 모르시더군요. 그걸 왜 찾느냐는 대답하기 참 쉽잖은 질문도 던지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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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가 '뉴욕제과점'이 있다고 했던 김천역 광장 왼편


나이 지긋하신 분도 모르고 경찰서에서도 모른다면 뭘 더 기대할 수 있을까하고 반쯤 포기한 채 다시 반대편 식당가로 갔습니다. 김천역에서 가까운 식당부터 문열고 들어가 호객하느라 절 맞아주던 사람이거나 안에서 일보던 종업원에게 또다시 세가지 단서를 읊으며 '뉴욕제과점'을 물어봤죠. 그들에게 제가 얼마나 황당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런데 그 중 네번째, 마지막 식당이었던 새거창식당 아주머니께서 옛날에 광장 반대편에 있었던 것 같다는 실마리를 주셨습니다. 다시 반대편으로 가서 서울식품에 들어갔습니다. 음료수 하나를 골라들고 계산을 하면서 주인아저씨로 보이는 분께 넌즈시 물어봤죠. 또다시 세가지 단서를 가지고 말입니다. 서울식품 주인아저씨는 뭔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저에게 반문을 하셨습니다.
그건 왜 찾아요?
그 질문을 듣고나니 왠지 뭔가 아시는 것 같기도 하면서 그냥 호기심을 발동시킨 동네아저씨일 것 같기도 해서 가뜩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여행동기를 말하기가 더 어려워졌지요. 그냥 얼버무리고 있는데 반복해서 세 번 정도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는 분이 작가인데 김천에 가거든 뉴욕제과점을 찾아보라고 했다고 대충 설명드렸죠. 그랬더니 그 작가이름이 뭐냐고까지 물으시더군요. 좀 꼬치꼬치 물으시는 게 이상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므로 김연수라고 바로 대답했고요.
연수가 내 생질이야.
쓰윽 웃으시더니 그렇게 말씀하셨죠. 정말 깜짝놀랐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김연수작가가 미국에 가있으며 자신도 소설속에 나온다는 등의 말씀도 해주시고, 저역시 소설 속 김작가의 어머님 병환이 현재 어떠신지부터 시작해서 놀랍다는 등의 말들을 이어갔죠. 물론 그분을 통해서 뉴욕제과점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냈습니다. 바로 오성과한음이었죠. 뉴욕제과점은 24시 국밥집이 되었다가 다시 오성과한음이란 호프집이 되었는데 그역시 문을 닫은 상태라네요. 그래서 왠지 씁쓸하기도 했지만 제가 찾으려 했던 '진실'이 '사실'과 일치함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그래서 묘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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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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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 삼촌. 확실히 닮았습니다.


호프집마저 문을 닫았으니 국밥대신 맥주 한잔 할 수도 없게 된 상황이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 사실 24시 국밥집을 찾게 되면 거기서 식사를 하려고 그때까지 허기를 참고 있었거든요. 그대신 아까 저에게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해준 새거창식당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아주머니께 씨익 웃으면서 밥먹으러 왔다고 하니까 친절하게 한 상 차려주셨습니다. 갑짜기 쏟아져내린 소낙비도 새거창식당에서 여유롭게 쉬며 피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김천역 앞에 있으면서 왜 식당 이름이 '거창'인건지는 물어보질 못했군요.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7. 8. 24. 17:22
지난 주말, 친구가 책 추천해달래서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었을 때'를 들고나갔지만 그친구한테 바람맞았습니다. 덕분에 나가는 지하철 안에서 단편 '첫사랑' 을 읽었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또다른 단편 '뉴욕제과점'을 읽었죠.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은유적이면서도 소박한 표현, '단문단문장문'의 기본에 충실한 문체, 그리고 그만의 감성...

바람맞아도 감미로운 (옛날에 가나쪼꼬렛 광고 페러디 입니다. 아시려나 ㅡㅡ;) 감동을 또다시 느끼게 해주더군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옛날에 '문학동네'라는 계간지에는 작가들의 자전소설을 한 편씩 실는 꼭지가 있었고 제 기억에 거기서 처음 '뉴욕제과점'을 읽었던 것 같네요. 나의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쓸 수 있을만한 이야기꾼이 아니고서야 자전소설이란 것이 의미를 갖을 수 없을껀데, (아마 그런 이유로 그 계간지에서도 그런 꼭지를 만들었겠죠. 일종의 작가 테스트?) 그당시엔 군더더기 없이 참 단백하게 썼구나 싶었던 게, 어제 다시 읽었을 때는 그 아래 깊숙히 스며있는 성찰까지 공감이 되더라고요. 20대 중반이었던 제가 30대에 접어든 김연수의 '뉴욕제과점'을 느꼈던 것과, 작품 속의 작가와 같은 나이를 살고 있는 지금의 '뉴욕제과점'이 다르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경상북도 김천의 기차역에서 나오면 광장의 왼편에 보였다던 그 '뉴욕제과점'. 그곳이 문을 닫은 후 24시 국밥집으로 바뀌었다며 자기 인생의 꺼져버린 작은 불빛 하나를 추억하며 서글퍼했던 김연수. 시간이 지나 용기를 내어 그 국밥집에 들러 고개를 떨군 채 국밥 한그릇을 비우고 나오면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또다른 작은 불빛들 앞에 눈시울을 붉혔던 김연수. 그의 그런 심정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지금, 김천역 앞의 옛 뉴욕제과점 앞을 나서며 작가가 봤다던 그 눈물에 비춰진 몽글몽글한 불빛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저에게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작은 불빛들이 거기에 비춰보여지게 될런지도...

인생이 그렇듯, 쉽게 찾아가 국밥 먹고 나오면서 그런 게 보일리는 없고, 자전거를 타고 가겠습니다. 혹시 국밥집마저 없어져서 도착해도 국밥 한그릇 먹을 수 없더라도, 제가 찾는 불빛은 김천역 광장 옆에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있을꺼니까요.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7. 7. 21. 15:05
예전에 박상우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소설창작커뮤니티에 몇 개월 다닌 적 있었는데, 거기서 기성작가들을 가끔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 발들이기 직전에 김연수 작가가 다녀갔다고 하더군요. 그전엔 알지도 못했던 작가였는데 박상우 선생님께서 섭외했다는 것 때문에 관심갖었던 게 시작이었죠.

그러다 그의 작품을 하나 둘씩 읽으면서 그사람이 부러워지더니 나중엔 제가 뭘 해도 저사람 같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질투가 나기까지 했더랬죠. 물론 제가 글쓰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뭘 해도 저사람만큼은... 아무리 잘나고 공부 잘하고 돈 많은 놈도 별로 부러워하지 않을만큼 삶에 만족하는 편인데 정말 드물게 느껴본 질투였죠.

오늘 조선일보에 김훈작가의 인터뷰기사가 있습니다. 두페이지나 차지하는 인터뷰기사를 읽으면서 짧막한 문장문장 하나하나 곱씹어 읽으며 몇 번이나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나 몰라요. 그러다 김연수 작가를 떠올렸죠, 내가 만족하며 살아도 저사람만큼은 할 수 없겠다 싶은 김연수에 비하면 김훈은 어떤 사람일까. 사실 김연수와 비교해서 생각하질 않았을 뿐 그전에도 이런 생각은 했었고 그래서 바로 답이 나왔지요.

예전에 김훈의 자전거여행을 펼쳐들었다가 그냥 덮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여전히 그렇게 들춰보지 않은 채로 책장에 꽂혀있죠. 몇 페이지 읽다가 알았거든요, 제가 이걸 이해하기엔 아직 덜 컸다고. 지금은 읽어도 바보 같을 뿐이겠지만, 생각 좀 많이 하고나서 읽으면 지금보다 더 재밌을 것 같았죠. 그때 생각이 김훈 작가를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다면 저같은 사람은 인사 말고는 아무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뼈에 살을 질펀하게 처발라야 하는 사람이 뼈대만 남기고도 그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사람과 말이나 통할까 하는 거죠.

오늘 조선일보의 김훈작가 인터뷰기사 바로 아래엔 김연수 작가의 김훈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그걸 읽고 또 한 번 김연수를 질투하게 됐습니다. 김연수는 김훈 작가와 술마시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나봅니다. 거기까진 공감할 수 있는 기쁨인데 제가 질투하는 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전 책장도 넘길 수 없는 작가와 말이 통한다니...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6. 10. 25. 13:58

우리나라 책들은 고급스럽고 참 이쁘기도 하다. 그래봐야 책 표지에 또다른 표지를 덧댄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전과 다르게 표지가 이뻐야 팔리는 건지 눈길을 끄는 화사함으로 포장하고 가로 또는 세로의 벨트 형태의 종이를 그위에 둘러 문학상 수상작이라던가 책의 중요 문구를 강조하곤 한다.

김영하의 새 책 빛의 제국에도 세로로 벨트가 둘러져있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는 폴 발레리의 시구의 인용이 적혀있어 --- 책 안에서는 전혀 그런 의도로 인용된 것 같진 않지만 --- 마치 책이 서점에서 항상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래서 소설을 안읽게 만드는 성공비결 서적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읽는데 거추장 스러운 세로 벨트를 푸르고 역시 불편한 겉 표지를 벗겨내고 나니 책이 꼭 복사해서 제본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4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이어서 그런지 종이도 얇고 가벼운 걸 써서 더더욱 제본한 느낌이 들었는데, 속 표지에(책의 진짜 표지를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하다니, 어떤 의미에서 내용보다 포장이 두꺼워질 날도 멀잖았다) 인쇄된 그림 역시 그런 느낌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책 제목의 발상을 알게 하고 왜 이런 이미지를 차용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속 표지에 인쇄되어있다. 그런데 그림을 알아봤다 해도 앞서 말한 것처럼 제본한 책을 달력종이를 싼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김영하는 장편에 대한 어떤 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그의 인터뷰 등을 통해 그가 말하고 있는, 시간을 이겨내는 문장을 통한 통시(通時)성이나 번역되어 읽혀도 손색이 없는 어떤 탈 국지(局地)성, 그리고 옳은 말이지만 잘 못 받아들인 단편과 장편에 대한 작품관과 장편 작가로의 이동 동기 등에 대한 생각이 고스란히 소설에 변질된 강박관념으로 녹아들어있다. 그런 표시들의 나열을 정말 지루하고 짜증스럽게 읽어내다보니 마지막 장면에서 르네 마그리트를 만나고 소설이 끝나게 되더라.

근래 '부자되기'나 '성공하기'를 다루는 책을 빼면 팔리기나 할까 싶지만, 그런 중에도 김영하만큼 성공한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만큼 그는 책 자체로도 유명해졌지만 여러 편의 영화에 원작을 제공하면서 '성공하여 부자된' 작가다. 다행히 그간 그의 작품들을 모두 좋아해왔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런 생각을 갖지 않았지만, 빛의 제국을 읽고 나니 김영하도 문단의 또다른 권력 아이콘이 되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모두 아는 그가 정치적 권력 아이콘이 됐드시 김영하는 경제적 권력 아이콘쯤 되지 않을까? 어쨌든 소재 하나만큼은 여전히 기발하니 아마 조금 있으면 이책도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6. 5. 16. 00:40

처음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김연수가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새 책을 기다렸으나 새 책이 나오질 않아서 그가 쓴 글 대신 그가 선택한 글이라도 읽자는 것이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 이유는 책 맨 마지막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 중에 적혀있다.

"현대 사회가 말하는 편리함은 사실 편리함이 아닌 것이다. 시간을 단축시켜준다는 컴퓨터는 오히려 시간을 더 빼앗았다. 자동차와 전철의 등장은 통근거리를 최대 두 시간까지 늘렸다. 아파트 생활의 즐거움은 적어도 10년간에 걸친 융자금 납부라는 올가미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융자금을 갚고 노후를 보장 받기 위해 평균적으로 매일 한 시간씩 멍한 정신으로 출근하고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도 또 저녁이면 원치 않은 술자리에 나갔다가 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혼 가정은 늘고 아이들은 길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이건 분명히 미친 짓이다."

평상시 내 생각을 그대로 적어놓았더라. 딱 저만한 생각을 가지고서 이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책을 읽는 내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너무나 급진적으로 현대 사회를 외면하는 아미쉬들 역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실적인 대안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역자의 글 따위는 안 읽었는데 책을 덮기 전 김연수의, 진짜 김연수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책 내용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구절은 안타깝게도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에 인용된 시 "A Place in Space" 의 한 문장이다. 뭐 그것도 책 안에 있으면 책의 내용이긴 하겠다.

"한때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라 여겼던 그 행성이 고작 우리 두 손 안에서 터지고 있네"

역시 김연수의 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 대승적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Posted by Lyle
her Little White Book2003. 12. 17. 13:17
- 허방 -
맘속 맺힌 매듭 풀지를 못해서
밤마등 헤매제만 돌아갈 디가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담은 아득해서
싸구려 막쇠주에도 취할 수가 없어서
거리에 불빛들이 웬수보담도 짚어서

내닫는 걸음마등 끝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개데끼, 짓뭉개데끼, 나라도 기억해라우
역전 뒤 힛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동안
아직까장 지달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라우.


오메, 쩌그 창문에 있는 보름달이 뿌얀 걸 봉께, 나가 아직까장 울고 있었든 모양이요잉.

- 보름달 -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