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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14 밤은 노래한다 - 김연수
her Little White Book2008. 10. 14. 19:50
지난번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을 읽고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이 흥미를 끌던 초반에 비해 중반 이후부터 지루하게 끌고 나가더니 결말 부분에서 너무 많은 걸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끝내버린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 장편 '밤은 노래한다' 에서 역시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번엔 결말의 내용에 대한 실망감까지 안겨줬다.

마지막에서 김해연이 최도식을 죽이지 않는 건 납득이 되질 않는다. 차라리 다시는 만나지 못했거나 했더라면 그나마 개연성을 해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 김해연이 잘나가는 만철 직원이라는 양지의 신분에서, 민생단 사건에 휘말려 밤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최도식을, 한 번 죽이려고 찾아갔다가 실패했던 그를, 다시 만나게 했다. 그런데 그저 오래전 편지를 전해줬던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헤어지게 한다는 건 지독히 억지스럽다. 물론 '작가의 말'을 통해서 왜 그런 결말을 지었는지를 이해도, 공감도 했지만 그건 작가를 이해했을 뿐 작품을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독자와 이야기해야 한다.

분명 주인공이 최도식을 찾아갔다면 그를 죽이러 갔어야 했음에도 되려 고맙다고 말하고 그자리를 벗어난다는 건 어색하다. 더구나 독자가 최도식에 대한 복수의 순간을 목격하며 마지막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 데서 작가 또한 그걸 의도했음이 뻔히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억지 매듭을 지었다는 건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한가지 더 실망스러운 건 작가 역시 그걸 알아차리고 있는 듯,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최도식의 아이들을 만나게 하므로써 김해연이 살의(殺意)의 마음을 접게 만드는 장치로 보여지도록 했다는 거다. 게다가 용의주도하게도 그 앞부분에서, 김해연은 겁먹은 여자 아이의 울음 소릴 뒤로 한 채 방금 전까지 총으로 그 아이의 부모를 위협하던 스스로를 미워하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순수한 어린아이'란 장치에 대한 개연성을 갖추게 까지 했다.

그런 결말로 하마터면 실망을 안고서 책을 덮을 뻔 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고 짜릿한 감동에 전율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다. 그 감동은 바로 1941년을 살고 있던 김해연이 최도식을 죽이지 않고서 헤어진 직후, 그가 1932년에 이정희가 죽기 전 최도식을 통해 그에게 보낸 편지를 꺼내면서 시작된다.
(전략)
그걸 알겠어요.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러기에 말했잖아요.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당신과 그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때, 이 세상은 막 태어났고,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평안 속으로 나는 막 들어가고 있다고.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김해연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이미 혁명가의 길을 걷고 있었던 이정희는 죽음을 앞둔 채 사랑 앞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정희를 잃고 나서 이정희의 뒤를 따라가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을 격게 되는 김해연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던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시간의 문제였을 뿐. (중략) 하지만 여전히 과연 누가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먼저 죽었다고 해서, 혹은 나중에 죽었다고 해서 그가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결국 그들은 다 죽었으니까.
이 세계가 청년들에게 가혹한 세계라면,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라면, 내가 몇 명을 조금 일찍 죽인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 있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면,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라면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그것을 더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정희와,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 삶과 죽음에 어떤 의미를 두지 않고서 이토록 하찮게 여기게 되는 김해연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더욱더 멀리 갈라놓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위 인용문 중 "죽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청년들마저도 노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세계" 라는 표현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다. 이 얼마나 간결하면서 그 길이보다 훨씬 많은 이야길 담은 문장이란 말인가.)

그리고 더불어 한가지 더. 대체 김연수 작가는 몇번이나 사랑을 해봤기에 지금까지의 작품 속 많은 사랑들을 저마다 다르게, 그리고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사랑을 하면서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정희의 편지도 그랬지만, 여옥과 김해연이 사랑을 나누게 되는 장면에서의 그 시각적 긴장감이란... 어찌나 사랑이 많은 작가인지 심지어 '사람'이란 단어가 '사랑'이라고 씌어진 오자도 발견될 정도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