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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6 뜨거움
A Day in the Life2008. 3. 6. 18:04
오늘 우리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공항에 마중나와 있는 나는 아까부터 속에서 끓고 있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뜨겁게 끓던 이 마음 속에 없어 마땅한 게 있다면,

그리움.



누나가 한국을 떠난 게 10년이 다되어가지만 떨어져 지낸 건 그보다 갑절은 더 오래 됐다. 누나도, 동생도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학교와 독서실에서 살았고 집에서는 잠만 잤다. 주말에도 마찬가지고 방학이라고 다를 게 없다보니 있었더라도 어색했을 가족여행이란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누나와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고, 이야기할 꺼리는 더욱 없었다.

누나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가버렸고, 동생이 서울에 가기 하루 전에 누나는 유학을 떠났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둘이 함께 서울에 있다는 게 어색한 대다가, 지역적 거리보다 더 두드러진 단절을 곱씹는 대신에 서로에게 전보다 더 무관심해질 수 있는 핑계를 만들어줬으니까. 그러면서 시간은 흘렀고 이제 가족은 모두 각자의 섬에 살게 됐다.

그시간동안 동생은 누나가 미워졌다. 누나가 서울로 간 후로 나이드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어제가 오늘인 것처럼 바라보는 건 동생의 몫이었고, 몇달치 또는 몇년치 주름살을 한꺼번에 발견하고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건 누나의 몫이었다. 누나가 온다고 하면 아픈 몸으로도 벌떡 일어나신 분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웃고 지내다 다시 가버리는 게 누나였다. 반면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실려가실 때 옆에 있었던 것도, 몇달씩 앓으시고서도 낫질 않아 만성이 되어가는 기침감기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동생이었다. 응급실에서 어머니 스스로 당신께서 돌아가신 후의 처리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걸 들으며 겁먹고 울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다. 아니, 그래야 하는 거다.



누나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집을 떠나있었다는 것 뿐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누나도, 나도,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방향을 찾지 못했던 그 마음은 분노를 닮아갔고, 그건 항상 누나를 향해있었다. 그리고 오늘, 어머니의 60 생일을 맞아 돌아왔다가 다시 집을 떠나는 누나를 마중하러 어머니와 함께 인천공항에 와있는 거다. 난 사실 누나를 마중하기보다 돌아선 후 눈물 쏟으실 어머니의 등을 지켜드리기 위해 여기 와있다. 항상 그랬듯 누나가 앞에서 보는 어머니의 웃는 모습 뒤의 우는 모습이 내 몫이었으니까.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자 어머니께서 누나에게 그만 들어가보라고 하신다. 내가 보기엔 아직 시간이 더 남아있는 것 같은데도 어머닌 그말씀을 하셨다. 아마 들어가라는 말씀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으셨을텐데... 그 한마디 하시려고 그렇게 망설이셨을텐데도... 어쩌면 누나가 들어가겠다고 하면 마음 아파질까봐 먼저 해버리신 건지도 모르겠다. 누나는 엄마에게 포옹을 하고, 나와는 눈인사만 나누고서 공항검색대를 가린 자동문을 향해 등을 돌린다.

그런데, 누나의 뒷모습에서도 눈물이 보인다. 어머니의 그것보다 감추는데 서툰 누나의 그 떨림은 어머니를 닮아있다. 누나는 몇 걸음 걸어나가다 말고 돌아서는데, 토끼만큼 빨갛다.

"엄마, 아프지 마...."

난 너무 의외여서 얼싸안고 우는 모녀를 바라보고만 있다. 의외인 건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엉뚱하게 누나의 뒷모습에서 눈물을 보게 됐기 때문일까? 아니, 그보다 아무 설명이나 이해 없이 내 안에 오랫동안 끓고 있던 게 식어버린 걸 느낀 탓이다. 너무 쉽게 한순간에. 그대신 다른 무언가 뜨겁게 뿜어져 올라오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아까보다 턱을 높히 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것도 의외다.

어머닌 누나가 검색대 안으로 들어가고 자동문이 닫힌 후에도 돌아서지 않으신다. 머리칼 하나 빠지지 않게 단정히 묶으시고, 보라색 스웨터에 스카프까지 두른 채 향수까지 입으신 분께서 지금은 거의 무릎을 꿇다싶이 하시고서 내부를 가린 두꺼운 간유리벽의 작은 틈새에 눈을 대고 누나의 뒷모습을 부여잡고 계신다. 그리고, 그런 당신의 뒷모습은 또 내 것이 된다. 잡을 곳도 없는 유리벽에 업드린 것처럼 붙어서서 작은 틈 사이로 눈을 굴려 자식을 찾으시는 내 어머니. 그런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도 익숙했던 미움 대신에 애잔함만 더해지고, 그래서 눈을 깜빡이면 창피해질 것 같은 지금, 그 뒷모습을 지키고 있는 게 나에겐 행복이란 생각을 처음 해본다. 하긴, 내가 봐 온 게 등 뒤의 눈물만이 아니었다. 누나보다 훨씬 많은 웃음의 시간들이 내게 있었는데, 미움에 가려 미처 즐기지 못한 게 나였구나.


결국 볼을 타고 뜨겁게 내린다.
그토록 참기 어려웠던 것이 이렇게 조금이었나 싶어 웃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마주한 채 누나라고 또 불러볼 날이 언제가 될런지......
오랜 시간동안 뜨거움에 가려져 지냈던 시간만큼 걸리진 말아야 할텐데.

07년 11월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