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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8 남아공의 백패커스에서 훔쳐온(?) 콘돔
Magical Mystery Tour/Africa2010. 6. 28. 00:28
캐이프타운을 떠나던 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백패커스를 떠나며 도미토리의 다른 여행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부엌에서 짐을 꾸리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내게 떠나느냐고 물었다. 그때 처음 마주친 그녀와 내가 오버스럽지만 마치 함께 밤을 보냈던 것 같은 인상을 남기게 된 건 그녀가 내 앞에서 팬티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마주쳤던 백패커스 부엌 테이블. 그녀는 금발이었고팬티 색깔은 기억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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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커스의 라운지 한쪽 선반에 커다란 와인잔이 있었는데 거기엔 콘돔이 가득 담겨있었다. 지나가면서 얼핏 보고 궁금했지만 차마 이게 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별로 필요도 없는 물건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성적인 것이 아닌, 그게 거기 왜 놓여있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이었다. 그러니 느낌상 공짜 같긴 했어도 괜한 오해를 살까봐서 공공의 장소에 놓인 그것에 다가가기조차 쑥쓰러웠다. 기실 아무도 날 바라보고 있지 않고 아무도 내 행동에 대해 오해하거나 판단조차 하지 않는 곳에서 주목받고 있을지 모른다는 조심성은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거란 걸 안다. 기념품 삼아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딱 두 개 집었는데, 왠지 훔쳐낸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공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자발적으로 어딘가에 동전을 기부하거나 "나 다 컸어요." 라는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리셉셔니스트를 찾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중에 집어온 걸 몰래 꺼내볼 때서야 뒷면에 "NOT FOR SALE" 이라고 적힌 걸 발견했다.

레드리본 마크가 후변에 인쇄된 콘돔은 남아공의 보건국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다. 인쇄된 글씨를 보면 09년 12월로 유통기한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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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AIDS 환자가 가장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들의 HIV 바이러스 감염율은 11% 에 달한다. 이중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는 감염자는 30%도 되질 않는다. 그런데 2002년부터 2008년 사이 10대들의 HIV 바이러스 감염율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같은 기간 10대 감염자들이 20대로 이동한 만큼 20대 이상의 감염율이 상승한 것은 콘돔의 보급 때문이다.

남아공에서는 레드 리본 캠패인 마크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레드 리본 캠패인이란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화합을 이루자는 취지의 운동인데, 그것의 상징인 레드리본은 따뜻한 혈액을 의미한다. 그런 레드리본은 그냥 길을 가다가도 벽이나 간판에 그려진 걸 무심코 보게 될만큼 꽤나 흔한데, 어디서 들은 이야기로는 캠패인의 국제 지원금을 여기저기 레드 리본을 그리는 데 탕진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캠패인 자체를 홍보하는 것보다 남아공 국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콘돔의 보급이었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