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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8 소나타가 남긴 흔적들
A Day in the Life2010. 9. 8. 13:54
아버지의 세번째 차는 소나타II 였다. 앞서 타셨던 포니II와 스텔라는 중고로 사셨으니 새차를 사신 건 이게 처음이셨다. 네번째 차를 사실 때 2년이나 고민하시던 걸 생각하면 94년에 소나타II를 새차로 구입하실 땐 아마 훨씬 더 그러셨을 꺼다. 아버지께선 내가 운전면허를 딴 2005년까지 그 차를 11년을 타시고서 나에게 물려주셨고, 그렇게 아버지의 첫 새차는 나의 첫 차가 됐다. 그 차에는 세월만큼보다도 더 아버지가 많이 묻어있었다.

중고자동차 매매 광고를 보면 값 좀 나가는 물건들에 붙은 뻔한 호객용 거짓말들이 있는데, 그것들중 하나는 이런 거다. "대학교수님께서 출퇴근 때만 이용하셨던 차로 상태는 신차급입니다." 대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를 깨끗하게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버지 때문에 약간 수긍이 가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차는 오래 됐음에도 정말로 출퇴근 하실 때만 탔셨기 때문에 1년에 고작 1만km 꼴로만 운행됐다. 게다가 워낙 천천히 운전하셨는지라 차 상태는 무척 좋았다. 그러나 물려받은 직후부터 서툰 운전실력과 급한 성격 때문에 차는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 자동차였지 운전 성향은 아니었나보다. 그동안 억눌릴 수밖에 없었던 이 차의 질주본능을 깨워주곤 했었으니까.

이 차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94년 한밤중에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를 처음 태웠다. 속내를 잘 드러내시지 않는 아버지시기에 그때는 몰랐는데, 당신의 첫 새차를 몰고 아들을 태우러 학교 앞으로 오시는 길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셨을 걸 이젠 알겠다. 아마도 소나타II 이후로 내가 산 내 차로 처음 부모님을 모셨을 때의 폼나는 느낌과 비슷했을 꺼다. 그리고 그이후로 아버지께서 재직하셨던 대학에 입학하고 또 졸업하기까지 소나타II는 부자간에 드물었던 둘만의 공간이 되어줬다. 늘상 학교 일로 바쁘셨던 아버지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내가 아버지보다 더 늦게 집에 들어오곤 했기 때문에 자율학습 후 귀가길에 태워주시곤 했어도 기억날만한 대화 한 조각이 드물 정도였다. 그렇기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아버지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등하교하는 일이 서먹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난 그걸 꽤 즐겼고 아버지도 그러셨던 눈치셨다. 아마도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이유였던 것 같다. 결국에 그 등하교 길은 내가 당신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줬고, 이 차는 그 시간의 공간적 배경이 되어줬던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차에는 세월보다 더 깊은 흔적이 묻어있다.

명절 때 아버지와 단둘이서 당신의 고향에 성묘차 오가던 길도 빼놓을 수 없는 흔적들 중 하나다. 나를 조수석에 태우시고서 십수년을 운전하셨던 그길에서 나는 대체로 잠들어있었는데, 아버지께선 여관비를 달라는 똑같은 농담을 꾸준히 반복하셨다. 언젠가 내가 운전을 시작하면 당신과 나의 좌석이 바뀌게 될꺼란 걸 예상했었지만, 막상 면허를 딴 후에도 아버지께선 나에게 운전석을 쉽게 내주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명절 연휴에 당신의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운전을 맡기셨다. 그리고 조수석에 옮겨 앉으신 아버지의 침묵이 길어졌을 때 문득 알게 됐다. 아버진 어느새 잠들어계셨다. 조수석에서 단골로 잠들곤했던 나와 내가 운전할 때 내 옆에서 잠드신 아버지의 교차된 모습은, 아직 운전면허가 없었을 때 막연했던 '언젠가는 내가 모시고 다니게 될 꺼다' 라는 예상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느낌이었다. 언제나 운전석에만 앉아계셨던 당신께서 차 안에서 잠드신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피곤하셨을 꺼다. 깨셨을 때 여관비 내시라고 말씀드리면 웃으실런지 속으로 생각했었다. 차마 말하진 못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 머물게 된지 10년이 넘었다. 교통 체증과 주차비 부담으로 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막상 면허를 따고 아버지로부터 차를 물려받은 후에도 운전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쉬울 때 유용한 도구가 되준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마트에 다녀올 때 생수를 두어개씩 사들고서 손에 비닐 배긴 자국을 남겨야 했는데, 운전을 하게 된 후부터는 두 달 먹을 생수를 한 꺼번에 나를 수 있게 됐다. 직장생활에 이력이 붙으면서 점점 돈보다 시간이 비싸지게 됐고, 그 때도 이 차는 대중교통에 시간을 맞출 필요 없이 내 시간을 좀 더 편리하게 계획할 수 있게 도와줬다. 이 차를 타고 몇 번 놀러다닌 기억들도 있고, 한 번은 사고를 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나의 소나타II는 급속히 노쇠했는데, 결국 그 차를 5년 타고서 나는 다른 차를 장만하게 됐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듯 나의 두번째 차도 중고 자동차지만 93년식 소나타II에 비하면 낯선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자동차다. 일단 차 열쇠부터 희한하게 생겼고, 사이드 브레이크도 자동이고, 시트에서 바람도 나온다. 그런데 소나타II와 두 세대쯤은 차이가 날 것 같은 차를 장만하고도 소나타II를 한참동안 처분하지 못했다. 그 이유들 중에는 앞에 적은 기억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 나의 그리고 아버지의 소나타II를 폐차했다. 폐차장에 차를 넘겨주기 전에 실내와 트렁크의 짐들을 비웠는데, 그중엔 아버지께서 넣어두셨던 물건들을 나역시도 치우지 않았던 것들이 꽤 많았다. 어딘지도 알 수 없고 기간도 한참 지난 세차권이나, 도로가 다 바뀌어서 쓸 수 없게 됐을 지도책 따위들은 어차피 버릴 것들이니 차와 함께 보내려했지만 결국 전부 다 꺼내 담게 됐다. 그렇게 물건들을 모두 비웠는데도 차 키를 넘겨주긴 쉽지 않았다. 텅빈 실내를 바라보니 아직 뭔가 가득히 들어 차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물건처럼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차는 떠나보냈고, 이렇게 그 흔적들을 꺼낸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