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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14 일루셔니스트를 함께 본 사람 (영화이야기 아님)
A Day in the Life2007. 3. 14. 11:46
애드워드 노튼 좋아하는데 마침 영화 예매순위도 높고 해서 재미있을 것 같아 어제 보러 갔더랬죠. 전 눈보다 귀로 영화를 봤습니다. 모르고 갔었는데 영화 시작할 때 필립 글래스 이름이 나오길래 영상보다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 특히 Orange Tree 마법을 쓸 때... 예전에 스텔스에서 봤던 제시카 비엘도 은근한 매력이 있더군요. 전 그배우의 엉덩이가 참 이쁜 것 같습니다. 그밖에 스토리는 그만그만한 것 같고, 구성도 식상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앞뒤를 섞은듯하며(처음부터 그렇게 의도된 구성이 아니라 시나리오상으론 시간순이었는데 편집하면서 단순히 후반부에서 5분 정도의 필름을 잘라다 앞에다 붙여놓았을 것 같네요.) 사람들이 반전이라 말하는 것도 별로 놀랍지도 않았고... 기대한 것만큼 못됐지만 반면 기대하지도 않았던 필립의 음악과 제시카의 엉덩이가 있었으므로 결국 만족스럽게 볼 수 있었죠.

그리고 좀 가십으로 삼기 망설여지는 이야기지만 자꾸 가슴 속에 남는 일이 영화와 함께 묻어있네요.

영화는 퇴근길에 목동 현대백화점 지하에 있는 CGV에 혼자서 보러갔고, 극장 왼쪽 통로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극장 불이 꺼지고 영화가 막 시작될 무렵에 제 왼쪽자리, 즉 통로에 인접한 남은 좌석에 한 여자분이 와서 앉더군요. 하나의 이벤트나 시간 때우기 수단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영화를 혼자보길 즐기는 것 같습니다. 연극이나 콘서트도 마찬가지로 그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시간 맞는 사람이 없더라도 혼자 즐기기를 꺼려하지 않고 때론 일부러라도 혼자 가서 즐기기도 하죠. 그런 행동 자체가 약간의 쓸쓸함을 이겨야 하는, 혹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살짝 견딜 수도 있어야 하는 무덤덤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단할 것은 없어도 흔하진 않으며, 그런 흔치않게 공감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옆에 앉아있다는 게 왠지 반갑더라고요. 게다가 이성인 여자분이... 하지만 이율배반적인 것이 그런 공감대는 각자가 따로일 때 공감대인 거지, 기실 공유를 해야 형성되는 말 그대로의 공감대를 위해 이야길 한다거나 하면 그때부터는 더이상 공감대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은 보고 반가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뭔가를 해본적은 없었네요. 달리 말하면 무덤덤함 이상의 용기를 내지 못한 걸 수도 있겠지만요.

영화가 시작됐는데 계속 왼쪽의 여자분이 신경씌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계속 부시럭거렸기 때문이죠. 들고 온 현대백화점 종이 쇼핑백 속에서 과자봉지를 꺼내더니 과자 봉지 소리를 부시럭부시럭 내면서 과자를 먹기 시작하더군요. 과자 먹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부시럭거리는 것 같았네요. 그 작은 과자봉지 속에 과자가 그렇게나 많이 들었던 건지 금방 먹어버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부시럭거렸습니다. 나중엔 과자 속에 부스러기도 한 다섯번은 털어서 먹는데 과연 그렇게 많이 털어나올 부스러기가 있었을까 싶었네요. 그뿐만 아니라 영화보는 내내 꿈틀거리면서 종이쇼핑백 속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며 종이 구겨지는 소릴 내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종이백을 치어 시종일관 잡음을 만들어냈습니다.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눈치를 줘볼까 했는데 노골적으로 바라볼만큼 날카로운 성격도 못되고, 옆에 앉아서 제가 그정도 힐끔거렸으면 어쩌면 약간 눈치챘을꺼란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혼자 영화를 즐기러 왔으니 남들 신경 안쓰고 편하게 있는 걸꺼다 이해하려는 쪽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랬네요. 여하튼 영화보면서 이정도 생각했으면 신경 많이 쓴 건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여자분도 혼자 보러온 제가 마찬가지로 신경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부시럭거리지도 않았고 또 남을 신경쓰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부시럭대지도 않았을것 같네요.

영화가 끝났습니다. 앤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보통은 거의 끝까지 앉아있는 편이지만 통로쪽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필립 글래스의 앤딩곡을 포기해야 했죠. 한편으로 왼쪽 여자분이 계속 앉아있어서 통로를 막는 핑계꺼리가 되어준다면 나도 그냥 앉아서 앤딩곡을 감상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저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섰는데 그러면서 왼쪽 여자분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어둠속에 두시간동안 가려져있던 사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거죠. 그런데 제가 일어섰을 땐 극장 불이 여전히 꺼진 상태었고, 스크린 불빛에 비춰볼 수도 있었겠지만 빤히 바라볼 자신도 없었네요.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여자분은 일어서서 통로를 비켜주었을 뿐 그자리에 그냥 서있었습니다. 아마도 통로를 비켜주면서 앤딩을 감상하려는 거였을까요? 그렇다고 그여자분 옆에 서서 마치 함께 온 것마냥 앤딩을 감상하긴 좀 그래서 전 고개를 숙인 채 여자분을 스치어 등뒤로 하고 그대로 극장을 벗어났네요. 극장을 벗어나면서 출구를 잘 못 찾아 헤매는바람에 극장 밖에서 그분과 마주치는 일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빠이빠이었던 거죠.

현대백화점 지하 목동CGV는 바로 오목교역과 연결되어있습니다. 11시가 가까워진 시간에 지하철역에 들어섰을 때 역사에 있는 꽃집이 아직 열려있길래 꽃집 아가씨에게 오늘 팀원들에게 바칠 장미꽃을 예약하느라 그곳에서 시간을 더 보내게 됐죠. 그러고 영등포구청 방향의 승강장으로 통하는 오른쪽 개찰구를 통과했고, 내렸을 때 집과 가까운 방향의 출구로 바로 나갈 수 있게 늘 가던 오른쪽 하향계단을 거쳐 승강장으로 내려갔으며, 승강장에서는 열차의 꼬리 방향으로 타박바닥 더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우연이 벌어진거죠. 걸어가는 방향 앞에서 승강장 밴치에 앉아있는 그여자분을 발견한 겁니다. 어두운 곳에서 옆자리에 앉은 것만 보았고 영화가 끝나서 일어섰을 때는 외투만 봤을 뿐이지만 그녀가 극장에서처럼 다리 앞에 놓은 현대백화점 종이백을 본순간 그냥 그여자분이 맞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닐꺼란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던 건 두시간 내내 신경쓰면서 의식하지 못한 채로 수집했던 그녀를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느낌 탓이겠죠.

밴치에 고개숙인 채 앉아있는 그분을 스쳐지나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밝은 곳에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우연히 그렇게 만나게 해준 것도 땡큔데, 제가 앞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얼굴을 들어주기까지 하더군요. 어쩌면 그분도 그렇게 눈이 마주친 저를 알아봤을지도 모릅니다. 아까 극장에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혼자 관람하러 왔던 남자고, KFC 콜라컵을 자신의 오른쪽 팔걸이에서 종종 뽑아들어 신경쓰게 했으며, 두시간 내내 자신에게 눈치주려는 것 같았고, 자리가 불편했던지 허리를 숙여 팔을 괸 자세를 반복했으며, 자신과는 다르게 앤딩을 포기하고 벌떡 일어나 나가버린 오른쪽 자리에 앉았던 남자. 그여자 앞을 지나치며 잠깐 눈이 마주친 순간에 제가 그여자를 알아봤던 것처럼 아마 그사람도 절 그렇게 알아봤을 거란 생각이 그순간에 들더군요.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는 글들 중 꽤 긴 편인 이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보다 더 자세히 쓸 정도로 그사람이 지금까지 속에 남아있는 이유를 전 헷갈려하고 있습니다. 처음 인상처럼 어떤 공감대 때문일까요? 아니면 영화 보는 내내 신경쓰게 했기 때문에? 우연히 지하철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인연으로? 아니만 잠깐 눈이 마주첬을 때 봤던 그녀의 얼굴일까요?

아마 그녀의 얼굴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안면장애... 화상을 입은 것 같은 피부였고 보통 사람들처럼 두 눈이 평행하게 있지도 않았으며 얼굴 형태역시 보통보다 더 길었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도 않았는데 기울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을 질끈 감을 뻔했습니다. 보통 그렇게 스치고 지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비껴내곤 했던 것처럼 그녀와의 짦은 눈마주침이 보통의 그것과 다를 게 없이 행동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애써야 했죠. 과장해서 피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빤히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또한 날 알아봤을 꺼란 생각과 함께 정말 순간적으로 그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스치고 지나가서 옆 밴치에 앉아서 열차를 기다렸죠.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열차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밴치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보통사람들처럼 멈추지 않은 열차 앞으로 일어서서 다가가더군요, 다리를 절면서요. 우린 서로 다른 칸에 탔고 제가 영등포구청에서 내려서 출구를 향해 걸어가면서 옆칸의 그사람을 다시 바라보았지만 이번엔 얼굴을 마주치진 않았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음날인 화이트데이에 부서 여직원들에게 줄 초코랫을 사러가기로했습니다. 그런데 여직원들에게 예약한 꽃을 함께 주면서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탕발린 말을 해줄 마음은 사라졌습니다. 그 느낌이 이번엔 공감대가 될 수 없고 대신 동정이 되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뭔가는 불공평하고 뭔가는 억울한 느낌입니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