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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4 루꼴라
A Day in the Life2009. 11. 4. 14:35
약간 쌀쌀했던 올림픽 공원의 2001년이었다. 음식을 취미이자 직업으로 여기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갔던 피크닉에는 낯선 사람들의 수 만큼 낯선 음식들도 많았다. 거기 온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기억하지도 못할 그 음식들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지만, 그저 '샐러드', '샌드위치', '파스타' 같이 그것들을 대표하는 평범함으로 부르기엔 아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재료가 낯익더라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거나, 처음 보는 재료들과 소스들이 단지 낯설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피크닉 음식이 그래도 되는 걸까 싶지만, 어차피 내 삶에는 피크닉은 커녕 김밥 싸들고 떠나는 소풍조차 없었다. 솔찍히 맛있다고 느껴지는 음식이라기 보단 그 생경함이 더 좋았다. 첫 인상에 반할 수는 없더라도 익숙해지면 즐기게 될 것 같은, 하지만 평범하지 않아서 익숙해지기 어렵고 그래서 더 즐기게 되는 그런 음식들. 루꼴라의 쌉싸름함 같았달까.

오로지 하나 기억하는 이름이 루꼴라였다. 그 음식들 중 가장 평범해보였던 BLT 샌드위치에 쌉싸름한 풍미가 준 즐길 수 있는 정도의 낯설음이 인상적이었다. BLT 가 무엇의 약자냐고 친구에게 물었었고, 그는 Bacon, Lettuce, Tomato 를 뜻하며 상추 대신 Rucola 를 넣었다고 했다. 그 모임이 있은 후에 다시 만난 그에게 애써 한가지 기억해뒀던 루꼴라가 좋았다고 아는 척을 했다. 약간 의도하기도 했었지만 그는 내가 기억해준 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상추 대신에 루꼴라를 넣은 것 역시 손님들을 기쁘게할 숨은 의도였던가보다. 그가 의도한 대로 난 그걸 즐겼고, 내가 의도한대로 내 감상에 그는 기뻐했다.

시간이 지나서 난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루꼴라는 그 후로도 가끔씩 다른 음식들에서 접할 수 있었고, 언젠가 씹어본 듯한 식감과 목구멍을 타고 코 바로 아래까지 풍기는 쌉쌀함을 여러번 되새겼지만 난 그 이름을 단지 샐러드나 피자 따위로 불렀지 재료로써 떠올린 적은 없다. 심지어 "루꼴라 피자" 를 메뉴판에서 보고도 반가워한다거나 그 때의 그 루꼴라였음을 연상했던 적도 없다. 루꼴라는 내게 그냥 좀 다른 종류의 기억으로 남게 된 거다. 레이블링, 인덱싱 해놓지 않아도 때가 되면 찾아지는 어렴풋한 뭔가로...

그의 갑짝스런 절교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식도 모른다. 당시 쓰고 있다던 책이 나왔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인데, 아마 앞으로도 그 책이 그의 마지막 소식이 될 것 같다. 내 삶에 피크닉이란 게 생긴다면 혹시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잖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그 유치함에 냉소를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서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인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더 싫다. 오늘 문득 루꼴라라는 이름을 다시 알게 된 반가움이 어지러움처럼 느껴지듯 말이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