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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8 Reply
A Day in the Life2008. 10. 28. 11:50
나의 편지에 돌아온 그로부터의 답장들은 항상 우체통 대신 전화통으로 들어왔었다. 지금이라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그시절에도 편지의 무게는 부담스러우리만치 무거운 것이었나보다. 그의 호출기 번호는 구이팔이칠오일. 음성사서함에서 그의 잘 받았다는 신호를 --- 편지에 비하면 그건 '신호'란 말이 맞다.--- 듣고나면 수화기에서 기계음으로 저장인지 삭제인지를 물으며 또박또박 불러주던 그 번호. 되뇌지 않는데도 그번호는 잊혀지지도 않는다. 마치 그건 첫 번호가 두번째 번호를 부르고, 두번째가 세번째를 기억하는 연쇄적인 느낌이어서, 내가 숫자 9를 잊어버리지 않는 한은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편지봉투와 편지지가 있다. 편지란 건 받아줄 사람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할까. 그만큼 자주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10년이 더 넘도록 나는 그 편지지만을 사다놓고 쓴다. 누군가 내 편지들을 모아둔다면 그것이 하나로 포개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후부터였다. 책상 한구석에 쌓아두거나, 책갈피에 끼워서 책장에 숨겨지거나 그대로 잊혀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편지들 중간중간에 끼워지는 일은 아마 없을 꺼다. 그리고 혹시 기억한다면 내가 보낸 말들이 일관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기억해주길 바란다. 아주 오랜만에 꺼낼지언정 모양만으로도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10년쯤 지나더니 이제 편지는 보내기만 하는 거지 답장하는 건 아닌 게 되버렸다. 우리들이 답을 하는 건 핸드폰 문자메시지, E-mail, 전자게시판과 그것의 댓글들이고, 편지는 아니다. 그래서 이제 편지에는 되도록 물음표를 그리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혹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장치랄까.

손으로 편지를 써본 게 언제인지 기억하냐고 묻는 인기가 좋은 저 사람은, 쓰는 게 가끔일지언정 답장은 그때그때 받았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쓰는 편지의 수신인이 비단 그와같이 편지를 쓰곤 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의 편지는 받은 사람으로하여금 오랜만에 편지지를 사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될 것만 같다. (나에겐 없는 능력이다.)

편지란 건 참 괜찮은 보람에 대한 증거품이다. 답장이 없어 쓸쓸해지는 건 무형의 공허함으로만 있었다 여겨질 뿐 증거로 남지는 않으니까. 그대신 답장을 받은 기쁨은 그만큼 더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내게도 꽤 훌륭한 증거품들이 있다. 그래서 쓰는 것보다 보내는 것보다 더 귀한 기억들이, 썼지만 보내지 못한 것들과 포개어져 함께 떠오른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