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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0 화해
A Day in the Life2010. 1. 10. 14:15
제가 사는 곳은 반지하입니다. 밤새 폭설이 내렸던 일주일 전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눈 쌓이는 모습을 그렇게 낮게 바라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눈밭에 눈 가루가 떨어지는 걸 옆에서 바라보는 건 고양이나 개들 처럼 네 발로 낮게 다니는 짐승들이나 보는 모습일 겁니다. 그걸 보고있자니 이 마을에 사는 길고양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눈을 피하고 있을까 싶어지더군요. 자동차 아래서 저 처럼 눈 쌓이는 걸 아래서 지켜보다가 차까지 덮어버린 눈 속에 갖힌 고양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반지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에서 고양이 오줌 냄새가 심하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음침한 계단 아래에 사는 고양이의 소행이 분명했어요. 간혹 퇴근해서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들어섰을 때 지층에서 저랑 눈이 마주친 뒤에 계단 아래로 숨어들어가는 고양이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B102호가 원망 스러워졌죠.

B102호가 원망스러웠던 이유는 그 고양이와 B102호의 친분관계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사는 고양이 탈리랑 방에서 함께 놀고 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밖에서 어떤 기척을 느꼈는지 탈리가 귀를 쫑긋 새우더니 현관 밖을 응시하더군요. 녀석에게 투시력이 있을리는 없겠지만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뭔가가 밖에서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어요. 저는 탈리 같은 능력이 없어서 그걸 눈으로 확인해야 했고, 현관으로 다가가서 도어경을 통해 밖을 살폈죠. 곧 B102호의 문이 열리면서 밖으로 나간 고양이를 찾는 B102호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렇게 밖에서 고양이를 찾아 안고서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아마 B102호도 고양이를 키우는데 집에 사람이 없을 땐 고양이를 밖에 내놓는가봅니다. 그러니 지하에서 진동하는 고양이 오줌 냄새에 대한 뒷처리 책임은 B102호게 있다고 할 수밖에요.

어제 한밤중에 밖에 볼일이 있어서 집을 나섰습니다. 냄새가 진동한 이후로 지하 계단 아래를 응시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가끔씩 제가 지나갈 때 그안에서 몸을 숨길려고 무언가 휙 지나가는 걸 보기도 했었죠. 어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진 않았습니다. 대신 밖에서 볼일을 보고 건물 현관을 다시 들어서는데, 계단 아래에서 무언가 쏜살같이 위로 튀어오르더니 제 옆에 닫겨진 현관문에 꽈당 부디치더군요. 정말 순식간이었는데 고양이가 지하에 살고 있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훨씬 더 놀랐을 겁니다. 제가 사는 건물 현관은 대부분의 빌라들처럼 두 개의 유리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는데, 저는 오른쪽 문만 열고 들어서고 있었고 저를 피해 밖으로 나가려던 고양이는 제 왼쪽 문으로 나가려다가 부디친 거겠죠. 열려있지도 않은 문에 들이댄 건 유리문인데다 밖이 어두웠기 때문일 겁니다. 녀석은 충격에서 회복되지도 않았을텐데도 곧바로 오른쪽 현관문에 서있던 제 다리 옆을 비집고 나가버렸습니다.

지하에 냄새를 피운 녀석에 대한 미움 탓이었는지 현관문을 닫아놓으려고 했어요. 밖으로 나가버린 녀석을 바라봤는데, 문 밖에 3미터 정도 떨어져서 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다시 못 들어오게 해야겠다 싶어 문을 닫으려던 제 팔이 머뭇거렸습니다. 그렇게 쏜살같이 절 피해서 도망나간 고양이가 멀리 가버리지도 않고, 제가 집으로 들어가버리고나면 다시 들어올 것처럼 차가운 눈밭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고양이는 조명을 등지고 서있어서 모습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보였던 건 가가멜의 고양이 아즈라엘처럼 오른쪽 귀에 동전만한 구멍이 있는 거였죠. 도로에 쌓인 눈이 그 구멍 사이로 녀석의 검은 실루엣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B102호가 안고 들어가던 하얀 고양이도 아니었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가끔 눈마주쳤던 갈색 고양이도 아니었어요. 어두운 색에 몸이 퉁퉁한 처음보는 그냥 길고양이 였습니다. 아마 제가 문을 닫아버리면 어디론가 가서 이 추운 밤을 보내게 될 겁니다. 다른 빌라를 찾아 기어들어갈지도 모르죠. 혹시 새로 찾아들어간 곳을 이미 차지한 고양이가 있다면 영역다툼 끝에 나머지 한쪽 귀에도 구멍이 날 수도 있겠죠. 그러니 이 추운 겨울날 지하에 고양이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건 제가 사는 곳만이 아닐 겁니다. B102호를 원망할 일도 아니고 추위를 피해 드나드는 길고양이들을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저를 마중나온 탈리가 귀를 곤두새우고서 제가 들어선 현관 밖을 한참동안 응시합니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