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기타를 처음 시작하면서 샀던 기타가 무엇이었는지 이름도 잘 기억 안납니다. 아마 삼익이거나 세고비아쯤 됐겠죠. 합판에 락스칠 해놓고 하드케이스만 씌워서 '악기'의 뽀대만 내놓은 그런 기타였습니다. 지금에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지 당시로써는 그정도로 충분했었죠. 아직 기타에 대해 진지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기타는 '원음'이라는 브랜드의 기타였습니다. 사실 이 악기는 썼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위에서 쓴 악기인 척하는 기타는 창피하다고까진 말하지 않습니다만 원음기타는 정말 창피합니다. 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내 기타 제작자들 중 대중적으로 알려진 일부는 대학교 동아리나 학원들에 기타를 공급하면서 영업을 합니다. 단기간에 많이 만들 수 있는 저가형 모델들을 여러개 공급할 수 있고 재고 처리도 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제가 처음 다녔던 학원을 통해서 그런 제작사들 중 하나인 원음기타를 만났습니다. 그런 후에 기타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해지면서, 제 귀가 여러가지 악기들의 소리를 접해보게 됐고, 어느 순간에 제가 쓰는 악기는 완전히 사기라는 걸 알게 돼서 충격을 받았었죠. 창피해서 어떤 부분이 그랬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원음기타와, 그 악기를 공급하는 학원 둘 다에게 사기를 당한 샘입니다. 저는 그 악기를 사기 위해서 초,중,고등학교 때 저금했던 돈을 모두 썼었습니다. 어린시절의 절약이 결국 그런 형편없는 귀결로 이어졌다는 게 가장 미운 부분입니다.
세번째 악기는 라미레즈 였습니다. 상당히 전통있고 유명한 스페인의 기타 제작가문의 이름입니다. 라미레즈 3세 이후부터 대중적인 사업형을 지향하면서 공방이 공장으로 바뀐 이미지가 생긴데다가, 현대 제작기술로 좋은 악기를 만들어내는 많은 제작자들이 나타나서 지금은 그 위상이 상당히 떨어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값을 못하는 악기는 아니고 당시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악기었습니다. 지금까지 따르고 있는 많은 기타 제작기법들이 라미레즈 1세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고, 세고비아를 비롯해서 수많은 유명 연주인들의 선택을 받았던 이름이죠. 선생님께서 유학가기 전에 쓰셨던 악기로 비록 라미레즈 연습용 모델이었지만, 당신께 처음 라미레즈를 받아서 연주해보았던 그날을 악기라는 게 참 신기하게 느껴졌던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2002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저와 함께 하고 있는 네번째 악기는 그로피우스 입니다. 2002년에 독일 제작자 그로피우스가 열번째로 제작한 악기로 주문하고서 꽤 오랜 시간 기다렸더랬죠. 기타의 거의 모든 사양을 주문했습니다. 1번 줄은 20플랫까지 있어야 하고, 앞 판은 시더(Cedar), 측후판은 하카란다(Jacaranda) 라는 식으로요.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기타가 되어서 제게 왔습니다.
그런데 약간 후회되는 부분있는데, 그로피우스를 주문할 때 6현이 아닌 7현으로 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여러번 했습니다. 기타연주곡 특성상 6현을 E 튜닝할 때도 있고 D 튜닝하게 되는 경우도 왕왕 생기는데 7현으로 제작해서 7번째 줄을 D 튜닝해놓으면 편리하겠다는 거죠. 특히 류트(lute) 곡 연주할 때 7현이나 8현 기타가 힘을 발휘할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문득문득 하다보니 기타를 한 대 더 갖고 싶은 생각으로 발전해버렸네요. 그렇다고 그로피우스를 버릴 생각이 없기 때문에 함께 쓰려면 좀 다른 성향의 악기가 되어야겠죠.
지금까지 생각한 사양은 대략 이렇습니다. 앞 판은 시더 더블탑 구조로 만들어서 단단한 소리가 났으면 합니다. 그로피우스는 앞판이 시더면서도 엄청 얇게 만들어서 소리가 무척 부드럽기는 하지만 콘트레라스나 라미레즈 같은 스페니시 기타와는 소리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죠. 새로운 기타는 어택이 빠르고 스페니시 성향의 소리가 났으면 합니다. 측후판은 아프리칸블랙우드를 사용해서 전체적인 기타의 이미지가 고딕 스타일이게 하고 싶습니다. 혹시 제작자에게 무늬가 아름다운 하카란다가 있다면 그걸 쓸 생각이지만 제작자에게 무늬를 맞추는 센스가 없다면 그냥 인디안로즈우드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현장은 650mm 으로 하고 7현 기타로 해서 7번 현을 D 튜닝 해서 쓰고 싶습니다. 튜너는 대중적인 금색의 튜너들이 식상해서 현대적인 느낌의 존길버트의 흑단 모델 또는 현재 그로피우스에 달려있는 프리윌의 다른 색깔 모델이었으면 합니다. 그로피우스가 앞 판과 넥이 수평이 아닌 각도를 이루도록 설계되어있는데, 하이포지션 운지할 때 그다지 편하다는 느낌은 없더군요. 그래서 라이징보드는 필요 없습니다. 더 세부적으로는 브리지에 구멍을 6개 아닌 12개를 뚫어서 기타줄을 맸을 때의 효율을 더 높힐 생각입니다. 칠은 물론 프랜치폴리싱 할껍니다. 로제트는 단순하면서도 각진 길버트(John Gilbert) 스타일이었으면 좋겠는데, 클래식기타에서 제작자의 개성이 가장 크게 들어가는 부분이어서 혹시 제작자에게 자신만의 개성이 있다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제작자들 중 의뢰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가격도 꽤 각오를 해야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