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과 26일에 자전거를 타고 경상북도 김천으로 출발했다. 전 날 술을 좀 마셨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워낙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기 때문인지 술에 덜 깬 상태로 해뜰무렵에 일어나 느릿느릿 짐을 챙기다보니 어느덧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출발; 영등포구청--(안양천)-->안양시
내가 사는 영등포구청에서 출발해서 안양천을 따라 내려갔다. 초행이라 두어번 길을 벗어났다가 돌아왔는데 한 10km 갔더니 숙취 때문인지 기운이 쫙 빠지더라. 멈춰서 생각했다.
"돌아갈까..."
아직은 출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만큼 와있는 나. 좀 더 가면 돌아가기도 힘들어질텐데... 뭔가 놓고 온 게 있다면 그걸 핑계삼아 돌아갔다가, 아마 그대로 눌러앉는 수도 있겠지. 이럴 땐 패달을 열씸히 굴러야 한다. 나아가는 것보다 돌아가는 것이 더 힘든 곳까지.
안양천 따라가기;아마 광명시 어디쯤일듯...
안양시--(1번,42번국도)-->이천시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안양천만 따라가다보니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어 불안했다. 차도로 올라왔지만 역시 낯설더라. 수원가는 1번국도를 찾아갔더니 작년 이맘때 쯤 출장 때문에 차몰고 종종 오갔던 곳이 나타났다. 안양역과 명학역을 지나는 그길을 이번엔 자전거로 따라가려니 왠지 쑥쓰럽더라. 차 안에 숨어있을 때와 자전거 위에서 다 드러나있을 때의 차이랄까?
1번국도를 따라 수원까지 갔더니 또다시 차타고 몇 번 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 내가 자동차고 밟았던 도로보다 자전거로 달렸던 길이 더 많다. 언젠가는 거꾸로, 자전거로 내가 지나왔던 길을 자동차를 운전해서 지나치며 옛 생각에 잠길 날이 올꺼라고 기대한다.
팔달구 수원화성에서 다시 멈춰섰다. 햇볕이 뜨거워지면서 점점 더 더워지고 그래서 더 빨리 지치는 것 같았다. 물을 한껏 마시고 썬블럭 로션을 바르고서 다시 출발하려는데 어떤 아저씨 하나가 내 옆을 지나면서 머뭇머뭇 뭔가 말을 걸려는 눈치를 보인다. 내 자전거 트레일러가 관심의 대상인가본데, 그냥 무시하고 얼른 출발했다. 저런 아저씨들은 호기심이 앞서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거다. 여러번 격어봐서 알고 있다. 일단 말을 섞고나면 존중해줘야할 것 같아 그전에 도망가는 게 습관이 되버렸을만큼 잘 알고 또 익숙해져있다.
수원화성을 지나 42번국도로 들어서려고 할 때 또다른 자전거 라이더가 내 옆을 지나갔다. 진짜 라이더처럼 쫄쫄이복장까지 입었더라. 빨리 갈 수 있어 좋겠다. 당신은 곧 왔던 곳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나 난 돌아갈 생각이 없는 편도라서...
용인시에 접어들었을 때 길가에 어떤 여자아이 하나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아저씨 힘내세요"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꼬마 하나가 방끗 웃고 있다. 힘에 부쳐 일그러졌던 표정을 펴진 못하고 입으로만 씰룩 웃어줘서 답례를 보냈다. 그아이가 내 얼굴을 웃는 얼굴로 봤어야 상처받지 않았을텐데...
용인시 도착했을 땐 긴 휴식도 필요했지만 점심을 먹어야 했다. 더 가버리면 점심먹을 곳이 마땅찮을 것 같았다. 밥먹을 곳을 찾아 시가지 골목골목을 드나들며 내 취향과 마침 지나가던 식당의 맞춤이라는 우연을 기다리거나 찾아헤맬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42번국도를 따라 용인터미널을 지나다보니 터미널에 롯데리아 간판이 보였다. 에너지 보충엔 밥이 좋겠지만 간단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듯. 사실은 너무 더워서 팥빙수가 먹고싶어졌던 거다.
용인에서 이천까지 가는 사이의 42번국도는 정말 악몽이었다. 어찌나 덥던지, 살 때는 그렇게나 시원했던 물이 금새 미지근함을 지나 이글거리는 느낌이었고 그걸 마시고도 목축임과 배부름 외에 시원함을 구걸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간신히 이천시에 도착했지만 이천시 시가지는 42번 국도와 멀찌감치 떨어져있었고, 또 갈아타야하는 3번국도와도 멀찌감치 사이가 안좋아보였다. 그렇게나 덥고 힘든 길을 참으면서 이천시에 가면 잠시동안이나마 문명의 숲에서 야성을 피해 안도감을 느껴보려고 했었는데... 3번국도로 접어들기 전 주유소에 있는 편의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으로 기대했던 안도감을 대신해야했다. 그곳에서 2L짜리 물을 한 병 더 샀다. 물은 내가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증발하고 있는 것처럼 바닥이 난다.
이천시 가는 42번의 어딘가, 물을 너무 마셔대서 노상방뇨 해야했던 그곳.
이천시--(3번,38번국도)-->충주시
비교적 쉬운 길이었다. 땡볕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진건지 아까보다 수월하게 페달이 밟혔다. 38번 국도로 갈아타는 장호원 근방의 하나로마트에서 산 500ml 짜리 얼린물이 정말 큰 힘이 되어줬다. 밥이 먹힐 것 같지 않아서 또 맥주부터 한 캔 마셨는데, 뭔가 먹어야할 것 같아 냉면 한그릇 먹고 하나로마트를 떠났다. 아직 길위에 익숙해지기 이른 건지, 문명이 이렇게 반갑고 시원하게 느껴지다니.
국도를 벗어나 충주호까지 이어지는 남한강을 탄금대쪽으로 질러가는 599번 지방도를 탔다. 1차선 도로라서 길이 좁고 갓길이 없어 위험하긴 했지만 가로수가 우거져서 해를 가려준데다 호수가 보이는 길이어서 한결 나았다. '중원고구려비' 이정표가 보였는데 거기 가기 직전의 갈림길에서 520번으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들러보진 못했다. 언젠가 역사책에서 봤음직한 이름인데 십수년 지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얼마 안되는 거리 앞에서 놓쳐야 하다니... "나중에 크면 하고 싶은 것 실컷 할 수 있다"던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그말씀, 난 그때도 다 거짓말이란 거 알고 있었다. 점점 더 시간에 쫓겨살면서 하고싶은 걸 참는데 익숙해지고 있다는 거, 그때도 예상했던 내모습...
충주로 들어가는 남한강을 막고 있는 '조정지댐'. 찍지 말라고 써있었지만 난 못봤다! ㅡㅡ;
수안보온천이 인접한 충주시에 설마 24시 찜질방 하나 없을까 싶었는데 딱 한 개 있다더라. 조금이라도 더 내려가야 다음날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 같아 충주시 중심가를 지나쳐 건국대까지 와버렸는데 그제서야 그사실을 알게 된거다. 너무나 지쳐서 찜질방에서 편하게 쉬고 싶기도 하면서, 역시 너무나 지쳐서 24시 찜질방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느니 어딘가에서 야영을 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 이율배반적 상황이라니...
결국 건국대학교 근방의 단월초등학교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해지기 직전에 텐트치고, 해지자마자 사람들 안보는 틈을 타서 학교 뒷편 수돗가에서 목욕과 빨래를 했다. 학교 앞 가게에서 맥주 두캔을 사다가 텐트를 설치한 놀이터 잔디밭에 앉아 유난히 밝은 달을 바라보며 뭔가 그리워할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야영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돌아와서 알게 됐지만 유난히 달이 밝고 붉은 빛을 띄어서 그동네 이름이 '단월동'이란다.
잔디밭에서 맥주마시는 동안 텐트에 침범해서 놀고 있던 개굴씨~ 안먹고 놔줌.
충주시--(3번국도)-->김천시
6시에 출발하고 싶었지만 해뜬 직후 일어나 밍기적거리다보니 7시에 충주를 떠났다. 지도에서 어림짐직했던 것과 실제 도로의 이정표상에서 확인한 거리의 차이가 상당했다. 게다가 어제에 비해 확연한 스테미너의 차이가 느껴져서 마음이 어찌나 급해졌는지... 밥을 먹고 출발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다. 충주를 떠나자 밥먹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몇 번 경험했지만 에너지 소비가 극도로 많을 땐 정말 밥 한끼 먹고 안먹고의 차이가 엄청나다. 그래도 출발 전 2L짜리 얼음물을 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조령을 넘기 직전 휴게소에 식당이 있어 들렀지만 문이 닫혀있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캔 뽑아마셨지만 갈증이 풀리지 않아 하날 더 뽑아마셨다. 조령을 간신히 넘어 내려갔더니 작은 마을이 나왔고 중국집 하나가 보였다. 그런데 아직 식사가 안된단다. 오전 10시를 막 지났는데 여길 지나게 되면 앞으로 어디서 밥을 구경할 수 있을지 몰라 조금 기다리기로 했고, 결국 밥먹고 쉬면서 거기서 1시간이나 보냈다. 그래도 역시 한국사람은 밥심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후로 상주시에 도착할 때까지 내 눈에 보인 건 땡볕과 흐르는 땀에 묻어내리는 뿌옇고 진득한 썬블럭 로션뿐이다. 상주시로 들어오기 직전의 3번국도는 자동차전용도로였는데, 지난 5월 속초여행 때 경찰에게 딱지를 떼인 기억 때문에 더위도 잊고서 정신없이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 전용도로 1km 남기고 중앙분리대 넘어에 경찰차가 서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 경찰차가 U턴해서 날 쫓아오기 전에 남은 1km 를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이... 그것 말고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만큼, 태양을 등지고 페달을 구르며 땀흘리 것 말고는 내몸이 한 게 없었다.
상주시를 지날 때부터는 마음이 놓였다. 김천에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런데 목적지인 김천시를 10km 앞두고부터 갑짜기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왜그랬을까. 마치 출발 후 10km 를 지났을 때 돌아가고 싶어졌던 것처럼 도착 전 10km 를 앞둔 곳에 멈춰서서 나는 지금까지 왔던 260km 를 되돌아가야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다. 왠지 끝을 봐도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항상 그렇듯 길 위에서 무언가 찾아질꺼라고 기대했었는데, 출발할 때의 망설임과 끝날 때의 허탈함, 그 사이 250km 는 마음을 놓은 순간부터는 더이상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고통일 뿐이란 게 어찌나 허탈하던지...
김천역
도착, 김천역
그렇게 나는 경상북도 김천시 김천역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출발 전에 상상했던 작은 불빛 하나를 찾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역전 새거창식당에서 설렁탕을 먹고 있는데 갑짜기 소낙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면서 뜨거워진 내 자전거를 식혀주더라.
첫날 150km, 둘째날 120km, 서울로 버스타고 돌아와서 고속터미널에서 집까지 30km. 총 300km 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