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피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1.25 미래를 짊어진 한국의 재즈 악동들
  2. 2009.07.24 올스타전을 즐기는 법
  3. 2008.12.21 잊을 수 없는 거인들의 대화
Roll over Beethoven2010. 1. 25. 09:27

이 글은 지난 1월 5일 EBS SPACE 공감에서의 "얘들아, 재즈를 부탁해" 공연 리뷰로, 월간 재즈피플 2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2010년 1월 5일 EBS SPACE 공감
김인영(베이스), 홍성윤(기타), 한웅원(드럼), 박진영(피아노), 강채리(피아노)

작년 재즈피플 12월호에 "재즈야, 우리 아이를 부탁해"라는 기획특집이 실렸다. 글을 쓴 재즈비평가 김현준은 자라섬국제재즈콩쿨의 결선 무대에서 만난 두 어린 피아니스트 박진영과 강채리를 조명하며 그들이 자라왔고 앞으로 자라날 우리 환경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들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기획의원으로 있는 EBS 스페이스 공감은 이 글의 제목을 반전시킨 "얘들아, 재즈를 부탁해 - 미래를 짊어진 한국의 재즈 악동들" 이란 타이틀의 공연으로 2010년 첫 무대를 꾸몄다. 지면을 통해 보여줄 수 없던 부분을 메워주려는 기획의도가 엿보였다. 한국 재즈에 대한, 그 미래를 책임질 연주자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채 말이다.

박진영과 강채리 뿐 아니라 작년과 올해 재즈피플의 "라이징 스타"로 선정된 한웅원, 김인영, 홍성윤 등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한국 재즈의 미래를 짊어질 연주자들이 물론 이들 뿐은 아닐 것이다. 김인영, 홍성윤, 박진영, 강채리는 자라섬국제재즈콩쿨의 결선에 오른 연주자들이고, 한웅원은 작년 재즈피플이 선정한 라이징 스타 중 한 명이다. 공연은 의도한 듯 다양하게 계획된 편성을 통해 모두의 개성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재즈의 미래를 조망해보는 기분을 갖게 했다. 말하자면 신년 사주팔자랄까.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이날처럼 이렇게 다양한 앙상블을 다시 만나면서 흐뭇했던 점괘를 떠올리게 되길 바란다.

보틀렉 슬라이드 기타로 스타일리쉬하게 시작된 에스베욘 스벤숀의 'Tide of Trepidation'이 공연의 첫 순서였다. 개성 있는 편곡에 이어 기타리스트 홍성윤은 자작곡인 'Not Yet'을 들려주었는데, 15박자의 이 곡도 그랬지만 이후 다른 이들과의 연주에서도 독특하고 인상적인 박자감각을 선보였다. 그의 트리오 멤버인 정진욱과 김민찬의 연주도 단 두 곡으로 그치기엔 아쉬울 만큼 좋았다. 쿨한 소리를 많이 알고 있는 듯한 드러머 한웅원은 능청스럽고 장난기 어린 잔재미까지 더해줬고, 최근 들어 수차례 무대를 접하면서 드디어 보잉을 처음 들려준 베이시스트 김인영의 독주 'Bye Bye Blackbird' 또한 인상 깊었다.

피아노 솔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된 접속곡 형태의 'King of Spade/Queen of Heart'에서 박진영은 후반으로 갈수록 곡의 구성 면에서 극적인 맛을 더해가는 작곡과 연주를 보여줬다. 뒤에서 독주로 연주된 강채리의 'Hand Stand'가 때 묻지 않은 소녀의 감성으로 완성됐다면 박진영의 감성은 상대적으로 음울하다. 왠지 그 모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이이기에 어색해 보이기도 했지만, 국내에선 이런 지향을 가진 연주자가 많지 않아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데 음악적인 강점이 될 수 있겠다. 한 대의 피아노로 박진영과 강채리가 함께한 즉흥연주는 연주 자체의 완성도보다 그들 각자의 개성을 대조해보는 기회가 됐다. 미려한 멜로디보단 무거운 감성과 곡의 구성적인 면에 강점을 드러내는 박진영이 피아노의 왼편에, 스윙 감각이 돋보이는 발랄한 강채리가 오른편에서 연주하여 이 두 피아니스트들의 서로 다른 개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막 자아가 완성돼 가는 10대들이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서 개성을 발산하는 게 가능한지 갸우뚱해지지만, 아이들에게 똑같은 억양의 웅변을 쏟아내도록 가르쳐놓고 그 안에서 옥석을 기대하던 게 이젠 옛날 일이구나 싶어 반가웠다.

필자는 작년 "퓨쳐스 앙상블 2009"의 공연 리뷰에서 어느새 정착된 한국의 재즈교육 환경과 거기에서 자라난 세대에 대해 설레는 기대감을 이야기했다. 언젠가부터 재즈 공연에 있어서만큼은 해외 연주자의 내한 공연보다 국내 연주자의 무대를 더 즐기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서 재즈가 대중들에게 더 즐거운 일이 될 거란 점괘는 바로 이런 무대를 근거로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다. 피곤한 몸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하루짜리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찍고' 가는 해외 유명 연주자들 덕분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이 신세대들의 연주에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갖고 있는 미완의 단점들은 '발전 가능성'의 다른 말일 뿐이다. 이는 한국 재즈, 혹은 어린 연주자들에 대한 관대한 시선이 결코 아니다. 이들의 연주를 오늘, 내일만 볼 게 아니기 때문에 갖는 그럴 듯한 기대감이다.

Posted by Lyle
Roll over Beethoven2009. 7. 24. 10:44
이 글은 지난 6월 23일 LIG ArtHall 에서 펼쳐진 재즈피플 2009 리더스 폴 수상자들의 공연 리뷰로, 월간 재즈피플 8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LIG ArtHall 2009년 6월 23일

2009 리더스 폴
배장은(p), 최은창(b), 크리스 바가(d), 손성제(s), 최우준(g)


프로그램을 받아든 순간 13곡이나 되는 곡 목록을 보면서 이날 공연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졌다. 시작되지도 않은 공연을 곡의 양으로 판단하는 것이 섣부른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연주되는 곡이 많다고 해서 마냥 좋은 공연이 될 리는 없고, 조용필이나 팻 메시니처럼 세 시간쯤 내리 음악을 쏟아내며 청중을 즐거움에 지치게 만드는 경우를 아무 때나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이날의 연주자들이 서로 여러 차례 협연을 해왔겠지만, 리더스 폴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여 “V.S.O.P.”를 펼치는 올스타밴드인 걸 생각했을 때 기대 반 의심 반의 마음일 수밖에 없었다.


라이징 스타 2009의 오프닝 무대로 공연이 시작됐다. 지난 6월의 “퓨처스 앙상블 2009” 공연을 통해 워낙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들이어서 연주를 들으며 공연 시작 전의 우려를 잊어버린 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로 연주된 ‘Autumn Leaves’에서 트럼펫과 색소폰이 주고받으며 진행되는 리듬의 변화와, 템포를 바꿔가며 진행되는 피아노 변주들은 스탠더드 곡들이 수도 없이 곱씹어 연주되어도 재즈를 재즈답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그들만의 모습이었다. 좀 생뚱한 비유지만 할 일 없는 주말에 만화책 수십 권을 옆에 쌓아놓고 누운 채 그 첫 권을 펼쳤을 때의 기분이랄까. 앞으로 즐길 거리가 얼마든지 많다는 풍족한 인상을 주는 오프닝이었다.


2009 리더스 폴 수상자들의 첫 곡은 칙 코리아의 ‘Windows'였다. 배장은의 최근 음반 <Go>의 첫 곡이기도 한데, 음반에서는 들을 수 없는 피아노 인트로가 있었다. 무대에 홀로 오른 배장은의 인트로는 그녀가 어떻게 다른지를 말할 수 있을만한 연주였다. 그런 연주에 청중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를 보인 최은창과 크리스 바가는 인트로가 끝날 무렵 무대에 등장했고, 이내 트리오 편성으로 곡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곡이 끝날 무렵, 십여 곡의 곡목들을 보며 내용면에서 허술한 공연이 될지 모르겠다는 단편적인 우려가 다시 떠올랐다. 성급하게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더 즐길 게 나와 줘야 할 것 같은 아쉬움은 이어서 연주된 ‘Propose’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우준의 기타는 다시 한 번 절정을 향해 치달아야 한다고 느낀 순간 끝나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더 듣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렇게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곡 진행상의 아쉬움을 제쳐놓고 생각해도, 이날 연주된 곡들은 대개 연주자를 소개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으며, 진면목을 보여주는 연주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연주자 개개인에 대해서는 인상 깊은 요소들이 곳곳에서 보이기는 했다. ‘Chicken’을 연주하면서 기타 현 위에서 핑거링, 피킹, 스트로킹 같은 통상적인 주법 말고도 비비고 때리고 긁기도 하는 최우준의 연주는 그가 기타라는 도구적인 틀을 넘어섰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마치 ‘식사’라는 곡을 연주할 때마다 하는 ‘밥 숟가락질’을 우리가 주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기타를 긁고 때리는 연주 자체가 특이하게 보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Moody's Mood For Love’에서 화려하면서도 다 보이지 않고 약간은 감춰진 듯한 배장은의 인트로는 또 한 번의 감명을 주었다. 콘트라베이스건 일렉트릭 베이스건 균형 있게 좋은 연주를 들려주는 최은창은 공연 내내 여러 연주자들의 다양한 곡에서 그 자신의 역할을 말해주는 연주를 펼쳤다. 자신의 곡 ‘Carla’를 연주하기에 앞서 그는 한국의 재즈 무대에서 여러 연주자들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평가로 이 자리에 선 것이며, 그것이 스스로에게도 기분 좋은 일임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리더스 폴 2009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강대관 선생은 대한민국 재즈 1세대로서, 손자뻘 되는 3세대 연주자들과 ‘Summertime’을 협연했다. 마치 마일즈 데이비스가 초기 재즈 록 시절에 선보였던 스타일을 연상시킨 이 연주는 상대적으로 짧은 듯했지만 이날 공연에서 선보인 곡들 중에서 그 의미상 가장 흐뭇하고 멋진 순간이었다.


필자가 꾸준히 응원하는 종목은 재즈밖에 없다. 그러기에 스포츠 팬들이 농구나 야구의 올스타전을 구경 가는 느낌을 약간은 갖고 있었다. 그런데 리더스 폴이라는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이날의 공연을 마련한 재즈 팬들은, 결국 이 연주자들이 무언가 진한 승부를 내길 원했던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경기 내용이 대체로 싱거웠다는 이야길 하고 있기에 스스로 재즈 팬이 맞는지 헷갈려하고 있기도 하다. 또 모두 일어나서 응원을 하고 있을 때 팔짱 끼고 앉아서 분위기 망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올스타전을 즐기는 법, 그건 흥겨운 축제를 즐기는 기분과 같다는 걸 안다. 하지만 팽팽하게 전개되는 긴장감은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요구할 수 있는 재즈 팬의 권리다. 마음만 먹었으면 그걸 충분히 해낼 연주자들이었다는 걸 잘 알기에 하는 소리다.


Posted by Lyle
Roll over Beethoven2008. 12. 21. 11:58
이 글은 사토코 후지이 트리오와 강태환 트리오의 공연 리뷰로, 월간 재즈피플 09년 1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피아니스트 사토코 후지이(Satoko Fujii)
베이시스트 마크 드레서(Mark Dresser)
드러머 짐 블랙(Jim Black)
앨토 색소포니스트 강태환
퍼커셔니스트 박재천
피아니스트 미연

서울 모차르트홀 2008년 12월 10일

‘대화’를 생각한다. 혼자 하면 독백이지만 둘 이상이 연주하면 음악도 대화다. 그들의 대화는 시종일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어울림만 있는 게 아니라 때론 누군가의 도발로 격앙된 싸움이 되거나 토론에 걸친 합의를 만들기도 하며 논쟁의 승리자를 낳기도한다. 사토코 후지이 트리오와 강태환 트리오의 협연도 다양한 모습의 대화였다.

1부 첫 순서였던 강태환 트리오의연주는 그들의 오랜 협연 경험만큼 내게 익숙했다. 자유즉흥에 ‘익숙함’이란 말은 선뜻 쓰기 어렵지만, 연주자들과 공감하는 기회를많이 가질수록 예측불허의 변화 속에서도 기대가 생기고 그 기대가 눈앞에서 실현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강태환 트리오의 연주는 편안했고 전체 공연의 주제를 제시한 역할을 했다.

이어서 연주된 사토코 후지이 트리오의구성즉흥곡 ‘Trace a River’에서 그 역할이 드러났다. 이들은 강태환 트리오의 자유즉흥연주를 반영했다. 그런 어법상의시도 때문인지 덜 정돈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구성적 모습을 되찾아가며 감동에 이은 여운까지 남겼다.쉬는 시간 동안 나는 마크 드레서의 보잉(bowing)이 담담하게 털어놓은 음울한 베이스라인을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매치-업(match-up) 대결이랄 수 있었던 2부의 듀오 연주들은 태권도나 유도의 단체전을 보는 듯했다. 그것들의 단체전경기 방식처럼 선봉, 중견, 대장의 대결구도였고, 마지막의 6인 혼합연주는 유도의 ‘자유연습’ 혹은 ‘소화다리’라 불리는 무한대련에 그 치열함을 빗댈 수 있었다.

첫 번째 피아노 듀오는 다른 듀오연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만나기 어려운구성이니만큼 대결보다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했다. 그리고 상대와 조화를 이뤄내면서도 스스로 빛이 나는 걸 보면서,결국 그날 공연을 통틀어 가장 큰 감흥을 준 연주로 각인됐다. 반면 타악 듀오는 어울리는 듀오 편성이란 일반적인 예측과는 시작전부터 벗어나 있었다. 박재천의 타악이 정형화된 틀에서 한참 벗어나 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짐 블랙과 함께한협연은 일정한 불안요소를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 드러나면서 연주는 박재천의 압도로 시작됐다. 짐블랙은 박재천의 옆에서 탬버린과 캐스터네츠를 두드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 잔인하다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박재천이 짐블랙의 어법으로 섞여들 수 있는 틈을 주었다. 이후로 긴장감에 눌려있던 감상의 재미가 살아났지만 조마조마함은 끝까지 계속됐다.박재천이 그의 방식으로 대화를 압도해나갔기에 연주는 승패를 닮은 결말로 이어졌지만, 그들의 멋진 대화에는 똑같이 박수를 보내고싶다.

앞선 타악 듀오에서 긴장을 놓지 못하게 했던 그 무언가는 결국 마지막의 6인 혼합연주에서 폭발해버리고말았다. 도장의 매트 위에서 닥치는 대로 대련을 벌이는 모습을 방불케 하다가 어느 정도 정리된 결말을 합의해나가고 있을 때,박재천의 갑작스런 도발이 불거졌다. 그들의 치열한 대화는 일순 엉뚱한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 때부터 마크 드레서는 무대중앙에 우뚝 선 거인처럼 엄청나게 커 보이는 착시를 일으켰다. 박재천의 도발이 결국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시발점이었지만, 연주자모두와 함께 마지막 3분의 감동을 이끌어낸 것이 바로 마크 드레서였기 때문이다.

그런 거인들의 매치-업을빼놓을 수 없는데, 진정 양 팀의 대장전이라 할 수 있는 명연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군가와 처음 마주하거나 어떤 책이나 노래하나가 그동안 살아온 각자의 공간과 시간만큼을 연결시켜주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저 감성적으로 묶여있는 것만으로도 낯선 이와오랜 친구의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강태환과 마크 드레서의 협연은 서로에게 그런 친구의 대화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날 공연이 다양한 느낌들을 일궈내긴 했지만 사토코 후지이 트리오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곡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떤 변형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