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5일 EBS SPACE 공감
김인영(베이스), 홍성윤(기타), 한웅원(드럼), 박진영(피아노), 강채리(피아노)
작년 재즈피플 12월호에 "재즈야, 우리 아이를 부탁해"라는 기획특집이 실렸다. 글을 쓴 재즈비평가 김현준은 자라섬국제재즈콩쿨의 결선 무대에서 만난 두 어린 피아니스트 박진영과 강채리를 조명하며 그들이 자라왔고 앞으로 자라날 우리 환경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들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기획의원으로 있는 EBS 스페이스 공감은 이 글의 제목을 반전시킨 "얘들아, 재즈를 부탁해 - 미래를 짊어진 한국의 재즈 악동들" 이란 타이틀의 공연으로 2010년 첫 무대를 꾸몄다. 지면을 통해 보여줄 수 없던 부분을 메워주려는 기획의도가 엿보였다. 한국 재즈에 대한, 그 미래를 책임질 연주자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채 말이다.
박진영과 강채리 뿐 아니라 작년과 올해 재즈피플의 "라이징 스타"로 선정된 한웅원, 김인영, 홍성윤 등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한국 재즈의 미래를 짊어질 연주자들이 물론 이들 뿐은 아닐 것이다. 김인영, 홍성윤, 박진영, 강채리는 자라섬국제재즈콩쿨의 결선에 오른 연주자들이고, 한웅원은 작년 재즈피플이 선정한 라이징 스타 중 한 명이다. 공연은 의도한 듯 다양하게 계획된 편성을 통해 모두의 개성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재즈의 미래를 조망해보는 기분을 갖게 했다. 말하자면 신년 사주팔자랄까.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이날처럼 이렇게 다양한 앙상블을 다시 만나면서 흐뭇했던 점괘를 떠올리게 되길 바란다.
보틀렉 슬라이드 기타로 스타일리쉬하게 시작된 에스베욘 스벤숀의 'Tide of Trepidation'이 공연의 첫 순서였다. 개성 있는 편곡에 이어 기타리스트 홍성윤은 자작곡인 'Not Yet'을 들려주었는데, 15박자의 이 곡도 그랬지만 이후 다른 이들과의 연주에서도 독특하고 인상적인 박자감각을 선보였다. 그의 트리오 멤버인 정진욱과 김민찬의 연주도 단 두 곡으로 그치기엔 아쉬울 만큼 좋았다. 쿨한 소리를 많이 알고 있는 듯한 드러머 한웅원은 능청스럽고 장난기 어린 잔재미까지 더해줬고, 최근 들어 수차례 무대를 접하면서 드디어 보잉을 처음 들려준 베이시스트 김인영의 독주 'Bye Bye Blackbird' 또한 인상 깊었다.
피아노 솔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된 접속곡 형태의 'King of Spade/Queen of Heart'에서 박진영은 후반으로 갈수록 곡의 구성 면에서 극적인 맛을 더해가는 작곡과 연주를 보여줬다. 뒤에서 독주로 연주된 강채리의 'Hand Stand'가 때 묻지 않은 소녀의 감성으로 완성됐다면 박진영의 감성은 상대적으로 음울하다. 왠지 그 모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이이기에 어색해 보이기도 했지만, 국내에선 이런 지향을 가진 연주자가 많지 않아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데 음악적인 강점이 될 수 있겠다. 한 대의 피아노로 박진영과 강채리가 함께한 즉흥연주는 연주 자체의 완성도보다 그들 각자의 개성을 대조해보는 기회가 됐다. 미려한 멜로디보단 무거운 감성과 곡의 구성적인 면에 강점을 드러내는 박진영이 피아노의 왼편에, 스윙 감각이 돋보이는 발랄한 강채리가 오른편에서 연주하여 이 두 피아니스트들의 서로 다른 개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막 자아가 완성돼 가는 10대들이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서 개성을 발산하는 게 가능한지 갸우뚱해지지만, 아이들에게 똑같은 억양의 웅변을 쏟아내도록 가르쳐놓고 그 안에서 옥석을 기대하던 게 이젠 옛날 일이구나 싶어 반가웠다.
필자는 작년 "퓨쳐스 앙상블 2009"의 공연 리뷰에서 어느새 정착된 한국의 재즈교육 환경과 거기에서 자라난 세대에 대해 설레는 기대감을 이야기했다. 언젠가부터 재즈 공연에 있어서만큼은 해외 연주자의 내한 공연보다 국내 연주자의 무대를 더 즐기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서 재즈가 대중들에게 더 즐거운 일이 될 거란 점괘는 바로 이런 무대를 근거로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다. 피곤한 몸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하루짜리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찍고' 가는 해외 유명 연주자들 덕분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이 신세대들의 연주에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갖고 있는 미완의 단점들은 '발전 가능성'의 다른 말일 뿐이다. 이는 한국 재즈, 혹은 어린 연주자들에 대한 관대한 시선이 결코 아니다. 이들의 연주를 오늘, 내일만 볼 게 아니기 때문에 갖는 그럴 듯한 기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