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신해철과 윤상의 '노땐쓰' 라는 음반에 '기도'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 노래에서 묻어나는 종교적 경건함따위 보다는 아래 인용하는 친구에 대한 가사 때문이다. 10년도 더 전에 이 음반을 샀을 때와 똑같이 지금도 나는 이 가사에 주목해서 노래를 듣다보면 등골이 오싹해짐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거친 비바람에도 모진 파도 속에도, 흔들림없이 나를 커다란 날개를 주시어 멀리 날게 하소서. 내가 날 수 있는 그 끝까지. 하지만 내 등 뒷편에서 쓰러진 친구 부르면 아무 망설임없이 이제껏 달려온 그 길을 뒤돌아 달려가 안아줄 그런 넓은 가슴을 주소서.
그리고 2년이 더 지나 이런 노래가 또하나 더 발표됐었다. 산울림의 13집에는 '무지개'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노래는 멜로디도 좋지만 그 가사가 마음을 후벼주는 매력을 갖는다. 외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구가 되어주는 그런 가사 말이다.
네가 기쁠 땐 날 잊어도 좋아 즐거울땐 방해할 필요가 없지
네가 슬플땐 나를 찾아와 줘 너를 감싸안고 같이 울어 줄께
네가 친구와 같이 있을때면 구경꾼처럼 휘파람을 불께
모두 떠나고 외로워지면은 너의 길동무가 되어 걸어줄께
앞서 말한 '기도'는 사실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의미를 가사에 담고 있다. 그 안에 친구에 대한 마음이 묻어있긴 하지만 그건 소승적 구도의 길 위에 거처가는 하나의 시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개'는 그런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딴세상의 천사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또다른 의미에서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천사 같은 친구가 등장한다. 이건 내 스스로 천사가 되느냐 혹은 내게 천사가 있느냐의 차이 같은 거다.
이런 노래를 들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어떤 걸까? 나에게 저런 친구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도 노래는 위안이 되어줄꺼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 사람도 또다른 누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쓸쓸함을 달랠 수 있을 꺼다. 그리고 내겐 후자였다. 내게 저런 천사 같은 친구가 있다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저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은 늘상 있어왔다. 그래서 저 노래들이 내게 위안이 되어줬던 것도 그런 의미었던 거다.
그런데 최근에 '무지개' 라는 노래가 짜증스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20년지기 친구 하나에게서 비롯된 그 짜증은 그 20년이란 시간을 쭈욱 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어렵고 힘들 때 내게 찾아오던 그 앞에서 안스러움에 눈물흘리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정작 좋은 일이 있을 때에 그는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곤 했었다. 내가 힘들고 의지가 필요할 때 그에게 기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 친구에 대한 실망은 다른 친구들에게로 옮아갔고, 그들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들자 짝사랑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들처럼 십수년 지낸 친구는 아닐지라도 가까이에 있어 자주 보곤 하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올 때마다 '무지개' 를 생각하게 됐다. 내 친구들이 '무지개'를 들을 때 과연 친구를 위로하고 싶은 생각부터 할까 혹은 친구로부터 위로받을 생각만 할까 하고 말이다. 최근에 날 괴물처럼 만들고 있는 이상한 외로움이 거기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씩 지워보자. 어떨 땐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차라리 이럴 때 내게 연락하지 않으면 지워지지나 않을 너희들, 하지만 한동안 연락하지 않으면 자연히 날 지워져버리는 가벼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