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는 국궁을(전통 활쏘기) 배우는 베트남 여자아이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국궁교실 명부를 보면 원래 이름은 '레 프엉 하' 인데 제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람들이 이미 '하하'라고 부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왜 '하하' 라고 불리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국궁장에는 외국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국궁을 수련하고 즐기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호기심에 체험하러 오는 관광객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가 있죠. 그런데 그들을 대하는 저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이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푸는 배려나 친절을 경계합니다. 거기엔 가식과 모순이 서려있기 때문이죠.
원래 우리는 이방인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로 옛날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며, 시골인심 좋다고 말로만 전해지는 지방에선 실제 그런지 모르지만 서울은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웃음보다는 찡그림으로 외면하곤 하는 사람들이 서양 외국인들에게는 무척 친절한 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마치 가면을 쓴 듯한 미소를 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해외에 여행나가서 외국인 입장이 되어 경험했던 친절을 가식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해외 여행지에서 항상 친절만을 경험했던 것도 아닙니다. 아마 관광버스 속이나 여행자 그룹 안에 갇힌 채 정해진 경로를 따라 타인과 섞임 없이 여행한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멸시, 모욕, 차별 같은 것도 제 여행 속엔 분명 있었죠.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그 이면까지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겁니다. 한단계 더 나가서 우리가 배푸는 친절은 기실 특정 부류에 한정적이고, 그외 자격미달의(?) 외국인들에게는 멸시나 차별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어떤 유대감도 없는 타인일 뿐인 외국인들에게 친한척 행동하는 걸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모순됨 때문이기도 합니다.
국궁장에서는 모두가 하하에게 친절합니다. 그녀는 대학생이고, 우리말도 꽤 잘 하고, 물가가 비싼 서울에서 유학하는 걸 보면 형편 좋은 집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짐작이 됩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걸 계산하고서 행동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제가 조심스러워집니다. 이건 미안함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녀와 이야길 하다보면 우리가 평소 베트남 사람들에 대해 보고 듣고 말하던 것들을, 그녀 앞에서는 평소와 다르게 이야기하거나 아얘 이야기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니까요. 하하도 그걸 모를 것 같지 않습니다. 하하는 농촌에 시집온 베트남 여자들을 진료하는 자원봉사자들의 통역을 하고 있다 하니 아마 저보다 훨씬 더 한국에서의 베트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겠죠.
하하 송별회에서
지난 토요일 하하를 국궁장에 만났습니다. 지금쯤 그녀의 고향인 하노이에 돌아가있을테니, 그날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활 시위를 당기는 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활을 당기는 느낌은 어땠을까요. 제 옆에서 활을 당기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녀도 저도 활에 화살을 메겨서 과녁을 향해 쏠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세와 힘을 기르는 수련을 하고 있고, 순서대로 벽을 보고 선 채 빈 활을 반복해서 당기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 사대에 서서 과녁에 화살을 날리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녀에겐 벽거울에 비친 자신의 활개편 모습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던 지난 토요일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실은 그날 그녀가 쓴 20파운드짜리 활로는 140미터 과녁까지 화살이 날아가지도 않습니다. 그게 허무한 일이 되지 않는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하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시간에 우리말을 꽤 능숙하게 말하고 읽는 그녀의 "한국 수련"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녀가 우리보다 더 우리를 진지하게 배우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외국인에게 무턱대고 배푸는 친절보다도 더 향기로운 뭔가를 느끼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