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ll over Beethoven2008. 2. 24. 19:09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서 나서는데 함께 극장에 갔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나온 노래들이 정말 다 비틀즈 노래에요? 저는 한 1/3 정도 빼곤 모르는 노래던데.
저도 반 정도밖에 모르겠더라고요.

마지막 주인공 주드와 루씨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연출된 "All you need is love" 에선 슬쩍 눈물까지 흘렸던 저로써는 그때서야 이 영화가 비틀즈 애호가들만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죠.

광고만 보고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은 단지 비틀즈의 음악이 영화의 사운드트렉으로 사용되어졌다고 알고서 영화를 봤을꺼에요. 그래서 어쩌면 훌륭한 사운드트렉을 가지고 있는 영화를 기대했을 꺼고, 얼마전 그같은 기대를 200% 충족시켜줬던 영화 "ONCE" 에서와 같은 감동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실망을 안겨줬을 법도 하죠. 그런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저로써도 영화 자체에는 그다지 감흥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의미가 있었죠. 미리 말하자면 이건 마치 비틀즈 애호가들의 파티와 같은 영화였습니다.

{비틀즈 키드들의 파티} 이 영화는 음악 말고도 거의 모든 요소들이 비틀즈로부터 나왔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나 배경 뿐만 아니라 주연과 조연들의 이름, 그리고 연출된 상황과 대사까지도 비틀즈에서 소재를 차용했습니다. 주연인 주드(Jude)와 루씨(Lucy)는 "Hey Jude",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에서 따왔다는 건 누구나 다 알겠지만, 그밖에 멕스(Max), 프로던스(Prudence), 세이디(Sadie), 닥터 로버트(Doctor Robert), 조조(JoJo) 모두 다 음악 또는 가사에서 띠온 이름들이죠.

단역으로 나온 조 카커(Joe Cocker)나 보노(Bono) 역시 그냥 출연한 게 아닙니다. 보노의 U2 는 "Helter Skelter" 등, 다수의 비틀즈 노래들을 공연장에 또는 음반에서 선보였었고, 조 카커역시 그랬죠.

케빈
제 또래라면 아마 어릴 적에 TV 에서 "케빈은 12살" 이란 드라마를 봤을 겁니다. 그리고 조 카커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 다라마의 테마곡이었던 비틀즈 원곡의 "little help from my friend" 로 우리에게 꽤 익숙해져있기도 합니다. 하긴 비틀즈 노래를 리바이벌 한 가수가 어디 한 두명이겠습니까만 조역이나 단역까지도 비틀즈 펜이라면 그 출연 의도를 알 수 있을만큼 영화는 비틀즈 애호가들을 향해서 영사기를 돌리고 있는 거죠.

영화의 마지막 씬인 세이디의 옥상 공연도 사실 비틀즈가 69년에 해체 직전에 단행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던 사건을 개기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렇듯 단지 음악 뿐만이 아니란 걸 알고 보면 영화는 정말 철저하게 비틀즈로 스토리를 기워냈습니다. 맞춰냈다거나 역었다는 말대신 '기웠다'라는 표현이 여기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데, 때로는 노래 가사가 영화에서 대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이나 배경이 되기도 하고 또 노래 가사에 나름의 해석을 붙여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들을 정말 기가막히게 바느질해놓았죠.

영화를 보던 중에 저는 안정효 작가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라는 소설이 떠올랐는데, 그 소설 속의 주인공 병석은 너무나 영화를 사랑한나머지 어렸을 때부터 봤던 영화들을 짜맞춰서 영화 한 편을 완성했고 그 영화가 결국 명작의 평가를 받아 수상까지 하게 되죠. 그런데 병석은 끝까지 자신이 영화를 창작했다고 믿고있다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결말에서는 자기 자신이 남들을 속였듯 자신도 자신 안에 키워왔던 '헐리우드 키드'에게 속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것에 비유하자면 이 영화야말로 비틀즈 키드가 만들어낸, 비틀즈 키드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비틀즈를 모르면 영화도 없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일반 관객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 뿐만 아니라 영화에 안 나오는 노래들의 가사까지 알고 있어야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전쟁터에 보내질 운명의 맥스가 반전과 자유를 갈망하며 연출된 "I want you" 에서 "she so heavy" 라는 가사가 절규하듯 반복되는 후렴부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등에 걸쳐맨 장면으로 바뀔 때 저는 폭소를 터뜨릴 뻔했습니다. 너무나 상황과 노래의 가사를 재치 넘치게 연출한 연출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죠. 그리고 영화 전반부에 주드가 일하는 리버풀의 선박회사에서 (아마도 일당을 지급하는) 창구 담당자인 노인과의 대화 중에 노인이 "When I'm 64" 라는 대사를 읊으며 자신의 은퇴에 대해 언급합니다. 멜로디 없는 그냥 대사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 짧은 대사 또한 "When I'm 64" 라는 노래의 제목으로써, 은퇴 뒤의 행복한 삶을 구상하는 내용의 노래죠. 약간은 억지스럽게 끼워넣은 씬 같기도 하지만 의도를 알아차린 관객이라면 반가워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She's so heavy

She's so heavy. 자유는 정말 무겁죠.


{멋찌게 연출된 장면들} 영화 내용 자체에 약간 어리벙벙해진 관객이라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이 조금은 있습니다. 주관적인 생각으론 비틀즈의 노래들을 그다지 훌륭하게 리메이크 한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노래들의 배경으로 멋찌게 연출된 장면들이 뮤직비디오처럼 지나가는 데는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듯 합니다. (두시간이 넘도록 그런 것만 보고 있어야 한다면 짜증스럽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감동했던 장면들은 빨간 딸기에 못을 밖아 피를 흘리는 듯 이미지 메이킹을 하면서 전쟁터의 피바다를 연출해낸 "Stroberry fields forever" 와, 세이디의 공연 실황으로 연출된 "Helter Skelter" 였습니다. 특히 "Helter Skelter" 의 경우, 대부분의 사운드르렉에 큰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 저로써도 상당히 후한 점수를 메기고 싶을만큼 좋아했죠. 동시에 노래를 한 다나 퍼치스(Dana Fuchs)에게 상당히 관심이 갔습니다. 외모에서 약간 카산드라 윌슨(Cassandra Wilson)의 분위기가 나더군요. 그런데 "Helter Skelter" 가 연출된 장면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연출이었습니다. 아마 같은 곡의 실황인 U2 의 "Rattle and Hum" 실황에서 같은 곡에 비슷한 연출을 썼던 것 같네요. 그래서 보노의 영화 출연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아이디어 제공이라던지...)

Helter Skelter

Helter Skelter 를 부르는 Sexy Sadie.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사실 저역시 영화 자체에 만족스럽진 않았습니다. 스토리를 상당히 중요시 하는 저로써는 이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말해도 될런지 지금도 헷갈려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찌릿찌릿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왜 닭살이 돋고 있는지 모르겠을만큼 정말 아무데서나 소름이 돋더군요. 비틀즈 키드의 한사람인 저로써는 어쩔 수가 없는가봅니다. 10대의 제 감성은 비틀즈의 음악들 주변을 맴돌면서 자라났으니까요. 마치 우리들이 '엄마' 나 '아빠' 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뭉클해지듯 저로써는 비틀즈의 노래가 틀어져나오는 것 만으로도 가슴 찡한 무언가를 느끼게 되나봅니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