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ll over Beethoven2010. 1. 25. 09:27

이 글은 지난 1월 5일 EBS SPACE 공감에서의 "얘들아, 재즈를 부탁해" 공연 리뷰로, 월간 재즈피플 2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2010년 1월 5일 EBS SPACE 공감
김인영(베이스), 홍성윤(기타), 한웅원(드럼), 박진영(피아노), 강채리(피아노)

작년 재즈피플 12월호에 "재즈야, 우리 아이를 부탁해"라는 기획특집이 실렸다. 글을 쓴 재즈비평가 김현준은 자라섬국제재즈콩쿨의 결선 무대에서 만난 두 어린 피아니스트 박진영과 강채리를 조명하며 그들이 자라왔고 앞으로 자라날 우리 환경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들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기획의원으로 있는 EBS 스페이스 공감은 이 글의 제목을 반전시킨 "얘들아, 재즈를 부탁해 - 미래를 짊어진 한국의 재즈 악동들" 이란 타이틀의 공연으로 2010년 첫 무대를 꾸몄다. 지면을 통해 보여줄 수 없던 부분을 메워주려는 기획의도가 엿보였다. 한국 재즈에 대한, 그 미래를 책임질 연주자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채 말이다.

박진영과 강채리 뿐 아니라 작년과 올해 재즈피플의 "라이징 스타"로 선정된 한웅원, 김인영, 홍성윤 등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한국 재즈의 미래를 짊어질 연주자들이 물론 이들 뿐은 아닐 것이다. 김인영, 홍성윤, 박진영, 강채리는 자라섬국제재즈콩쿨의 결선에 오른 연주자들이고, 한웅원은 작년 재즈피플이 선정한 라이징 스타 중 한 명이다. 공연은 의도한 듯 다양하게 계획된 편성을 통해 모두의 개성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재즈의 미래를 조망해보는 기분을 갖게 했다. 말하자면 신년 사주팔자랄까.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이날처럼 이렇게 다양한 앙상블을 다시 만나면서 흐뭇했던 점괘를 떠올리게 되길 바란다.

보틀렉 슬라이드 기타로 스타일리쉬하게 시작된 에스베욘 스벤숀의 'Tide of Trepidation'이 공연의 첫 순서였다. 개성 있는 편곡에 이어 기타리스트 홍성윤은 자작곡인 'Not Yet'을 들려주었는데, 15박자의 이 곡도 그랬지만 이후 다른 이들과의 연주에서도 독특하고 인상적인 박자감각을 선보였다. 그의 트리오 멤버인 정진욱과 김민찬의 연주도 단 두 곡으로 그치기엔 아쉬울 만큼 좋았다. 쿨한 소리를 많이 알고 있는 듯한 드러머 한웅원은 능청스럽고 장난기 어린 잔재미까지 더해줬고, 최근 들어 수차례 무대를 접하면서 드디어 보잉을 처음 들려준 베이시스트 김인영의 독주 'Bye Bye Blackbird' 또한 인상 깊었다.

피아노 솔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된 접속곡 형태의 'King of Spade/Queen of Heart'에서 박진영은 후반으로 갈수록 곡의 구성 면에서 극적인 맛을 더해가는 작곡과 연주를 보여줬다. 뒤에서 독주로 연주된 강채리의 'Hand Stand'가 때 묻지 않은 소녀의 감성으로 완성됐다면 박진영의 감성은 상대적으로 음울하다. 왠지 그 모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이이기에 어색해 보이기도 했지만, 국내에선 이런 지향을 가진 연주자가 많지 않아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데 음악적인 강점이 될 수 있겠다. 한 대의 피아노로 박진영과 강채리가 함께한 즉흥연주는 연주 자체의 완성도보다 그들 각자의 개성을 대조해보는 기회가 됐다. 미려한 멜로디보단 무거운 감성과 곡의 구성적인 면에 강점을 드러내는 박진영이 피아노의 왼편에, 스윙 감각이 돋보이는 발랄한 강채리가 오른편에서 연주하여 이 두 피아니스트들의 서로 다른 개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막 자아가 완성돼 가는 10대들이 과연 한국이란 나라에서 개성을 발산하는 게 가능한지 갸우뚱해지지만, 아이들에게 똑같은 억양의 웅변을 쏟아내도록 가르쳐놓고 그 안에서 옥석을 기대하던 게 이젠 옛날 일이구나 싶어 반가웠다.

필자는 작년 "퓨쳐스 앙상블 2009"의 공연 리뷰에서 어느새 정착된 한국의 재즈교육 환경과 거기에서 자라난 세대에 대해 설레는 기대감을 이야기했다. 언젠가부터 재즈 공연에 있어서만큼은 해외 연주자의 내한 공연보다 국내 연주자의 무대를 더 즐기게 됐다.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서 재즈가 대중들에게 더 즐거운 일이 될 거란 점괘는 바로 이런 무대를 근거로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다. 피곤한 몸으로 비행기에서 내려 하루짜리 공연을 위해 한국을 '찍고' 가는 해외 유명 연주자들 덕분이 아니란 말이다. 물론 이 신세대들의 연주에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갖고 있는 미완의 단점들은 '발전 가능성'의 다른 말일 뿐이다. 이는 한국 재즈, 혹은 어린 연주자들에 대한 관대한 시선이 결코 아니다. 이들의 연주를 오늘, 내일만 볼 게 아니기 때문에 갖는 그럴 듯한 기대감이다.

Posted by Lyle
Roll over Beethoven2009. 6. 22. 18:21

이 글은 퓨처스 앙상블 2009 공연 리뷰로 월간 재즈피플 7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BS SPACE 2009년 6월 10일

퓨처스 앙상블 2009 배선용(t), 신명섭(ts), 윤석철(p), 정상이(b), 한웅원(d), 허소영(v)


퓨처스 앙상블(Future's Ensemble) 2009’의 무대가 마련된 공연 당일 EBS 방송국 앞의 매봉역 지하철 역사에는 거리 연주자들의 색소폰 연주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주할 수 있는 무대로 행인 앞인들 마다하지 않는 즐거운 아마추어들이었지만, 그들 앞에 멈춰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 EBS의 <다큐프라임>은 사람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어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다뤘다. 사람들의 착각을 보여주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연주자의 학력이나 경력에 따라서 연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쉽게 예상되는 결과를 낸 그 실험은 국내 콩쿨 우승경력의 바이올린 연주자를 통해 이뤄졌는데, 자연스럽게 한국의 재즈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한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 중인 재즈 연주자들 중 유학 경험이 없는 연주자가 얼마나 있던가. 그러나 그들의 프로필에 흔하게 등장하는 유학 경험이나 유명 연주자와의 협연 경험들이 한국의 재즈 팬들에게 어떤 작용을 기대한 결과물이라면 상당한 오해일 듯하다. 그들의 학력과 경력은 대중들에게 잘 모르는 연주자의 음반을 고를 때 비교적 친숙한 연주인과 협연한 음반부터 접해보는 정도의 참고적 의미 이상은 아닐 거라고 본다. 한국 재즈에 고정관념과 편견이 작용한다면 그건 평가절하의 결과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을 테고, 다행히(?) 학력이나 경력으로 포장된 채 그들이 세계적인 연주자라는 대중의 착각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재즈 연주자들에게 유학경력이 흔하고 그것도 조기유학이 아닌 늑장유학인 경우가 많다는 건 단순히 한국에서 재즈를 배울 수 있는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날 만난 여섯 연주자들에 대한 생뚱맞은 반가움은 거기서 비롯됐다. 별로 접해보지 못했던 (유학 경력 없는) 이력의 20대 젊은 연주자들이 그렇게나 재즈를 훌륭하게 그리고 재미나게 연주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거다. 기실 이런 젊은 연주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데 단지 필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탓이라면 더 반가운 일이다. 솔직히 이날의 공연에 앞서 ‘실용음악’이란 이름으로 재즈를 포괄하고 있는 학과나 학원에서 공부한 연주자들의 공연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퓨처스 앙상블에 대한 의아함은 그들의 연주가 실용음악이 아닌 재즈였기 때문이었다. 첫 곡으로 연주된 섹스텟 편성의 ‘Rising Starts’를 들을 때부터 그랬는데, 이 곡은 그날 연주된 곡들이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란 걸 눈치 채게 했다. 그러한 시작부터 나머지 공연 내내 스윙과 비밥을 기반으로 한 20대의 연주자들은 내게 낯선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즈를 담고 있는 것처럼 얘기되는 ‘실용음악’이 사실 얼마나 재즈와 거리가 먼 표현이었던가.


여섯 명의 출연자가 서로를 소개해가며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형태로 진행된 이날 공연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연주자는 피아니스트 윤석철이었다. 세 번째로 연주된 윤석철 작곡의 ‘Low Passion’에서 무거운 톤으로 철골 같이 심어지는 반복적인 리듬연주와 몰아치는 솔로는 남은 공연 내내 그를 주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찌나 인상 깊었던지 뒤이어진 허소영의 ‘Moody's Mood For Love’의 인트로까지 전 곡에서의 에너지가 이어지는 듯 했고 후반부의 ‘거울’이나 ‘Hope’까지 그의 거침없는 솔로는 계속 됐다. 전체 곡 분위기를 미리 다 보여주는 것 같아서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던 ‘Moody's Mood For Love'의 피아노 인트로는 허소영이 곧바로 노래로 이어받기 아쉽게 만들었던가 보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기 전 그런 윤석철에게 박수를 보내는 여유를 보여준 허소영의 노래 또한 정말 대단했다. 제임스 무디(James Moody)의 솔로에 가사를 붙여 부른 그 곡은 그녀의 첫 앨범의 컨셉트를 대변하면서 블루지한 목소리와 함께 범상치 않은 신인임을 직감케 했다.


연주된 곡들은 대체로 직관적으로 이해되어 그 자리에서 즐길 수 있었던 곡들이었고, 반복적인 멜로디를 아름답게 발전시켜나가는 신명섭의 ‘Hope’ 같은 곡은 특히 더 그랬다. 반면 배선용의 ‘거울’은 라이브라는 일회성이 아리송함을 남기는 곱씹어 보고픈 곡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곡에서 피아노에게 멋진 공간을 남겨주면서 스스로는 전면에서 내지르지 않는 모습이 의외였다. 다른 곡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절제된 건지 혹은 소극적인 모습인지 모를 일이지만 확실히 앞으로 더 기대해 볼 연주자였다. 공연 다음날 낯선 곡 하나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그 곡은 한웅원의 ‘Strawberry Princess’였다. 정작 공연장에서는 좋은 리듬감 말고 특별한 감상 포인트를 잡지 못했었지만 역시 탄탄한 기본은 튀지 않고도 오랜 인상을 남긴다. 정상이는 자신의 곡 ‘May Dance’에서 주제를 담은 인트로 뿐 아니라 전곡에 걸쳐 범상치 않은 베이스 라인을 들려줬다.


퓨처스 앙상블과 같은 젊은 신인 연주자들은 어떤 해답과도 같은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근래 들어 느끼고 있는 한국 재즈 연주자들에 대한 신선한 즐거움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하는 의문이 들 무렵에 이들의 무대를 통해 적절한 답을 만난 셈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필자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닐 거다. 과거 국내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유학을 떠나 재즈를 배웠던 세대들과는 달리 지금은 국내에서도 재즈를 공부할 기반이 전보다 더 많이 갖춰져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게 한다. 더불어 어릴 때부터 재즈를 진지하게 듣고 연주하길 즐기던 스윙키즈들이 전보다 나아진 기반 위에서 재즈를 수련하며 앞으로도 재즈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무럭무럭 자라나주고 있지 않을까. 이건 분명 즐겁고 설레는 기대감이다.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