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y in the Life2007. 10. 16. 15:19
얼마전에 제 일터가 있는 목동에는 교보문고가 생겼습니다. 가끔 점심시간에 가기도 하고 그보다 더 왕왕 근무시간에 땡땡이치러 가곤하죠. 오늘은 점심시간에 갔다가 근무시간을 비집고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서 돌아왔으니 점심시간과 땡땡이가 걸친 날이로군요.

근래에 서점가서 야금야금 보는 책이 있습니다. "서울여행" 이란 책인데 한 권 사버리고 싶다가도 밝히고 싶지 않은 엉뚱한 이유로 사질 않고서 서점에 갈 때마다 야금야금 들춰보는 책이죠. 그리고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도 함께 핥고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가 수상한데다가 역시 좋아하는 작가 윤성희의 작품을 오랜만에 접할 수 있었죠. 지난 토요일엔 반디앤루니스에서 같은 책에서 김연수 작가의 중편을 읽었고, 오늘은 교보문고에 가서 같은 작품 한 번 더 곱씹고나서 윤성희 작가의 작품으로 넘어갔습니다.

윤성희 작가의 작품의 첫장을 읽다가 갑짜기 커피가 마시고 싶어지더라고요. 목동 교보문고 안에는 illy 까페가 있는데 책을 거기로 들고 들어가긴 좀 그래서 테이크아웃 해다가 서가에 가서 다시 윤성희 작가와 만났죠. 그렇게 빨대로 커피를 뽑아올리면서 책장을 넘기던 중 문득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의 뒷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 책의 가격이 보고 싶어진거죠.

몇년 전까지 전 꽤 많은 수의 각종 문학상수상집들과 창작과 비평 또는 문학동네 등의 계간지들을 사모았었습니다. 그런 책들을 사는 이유는 작가가 단편집을 내기 이전에 그들의 작품을 접해볼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는 이율배반적으로 더이상 사지 않는 이유가 되었죠. 나중에 단편집이 나와서 그책을 사면 겹치기도 하고 또 그런 책들이 계속 쌓이다보니까 애물단지처럼 책꽂이만 넉넉하게 차지하길래 더이상 사모으지 않고 서점에서 보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돌고 돌았지만 결국 쉽게 말하면 "짬뽕 책 사기엔 돈이 아깝더라" 라는 거죠.

그런데 오늘 illy 커피를 들고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근작을 들고 있으려니 어떤 가치전도된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책의 가격을 확인해보고 싶어진 겁니다. 98백원이었죠. 커피는 4천원이었고요. 서점에 서서 책을 읽는 것의 의미가 단지 돈을 아끼는 것에서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연 그 잠깐의 순간에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산 4천원짜리 커피가 사지 않고 서점을 지날 때마다 잘근잘근 읽겠다던 책 한권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있는가 싶어지더군요. 혹은 그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서점에 갈 때마다 그런식으로 커피를 한잔씩 마시게 된다면 커피는 수단이 되고 여전히 책은 목적이지만 목적보다 수단을 위한 지출이 많아지게 되어 정말 '가치전도'가 맞게 되는 거죠. 이건 저 개인에게 되묻는 질문이지 타인에겐 이런 거 물어볼 생각도 없습니다.

물론 illy 커피 한잔의 재화적 가치는 서점에 있었다는 상황과는 별개죠. 커피 한잔은 제가 어떤 상황에 있었든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해결해준 그 자체로 4천원의 가치를 다했습니다. 옛날에 그런 비싼 커피 사마시는 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거 두 잔 정도 마시는 걸 참으면 책 한 권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버렸다는 게... 책도 살 수 있고 커피도 살 수 있게 됐으니 그리 변한 건데, 그렇담 들고 읽던 책을 안 사는 건 또 뭔지...

그래서 윤성희 작가의 근작 단편집 하나를 샀습니다. 괜히 혼자 찔려했다고 앞으로 커피 안마시겠다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작품집을 안사는 다른 이유들을 무시한 채 예외적으로 오늘 들고 있던 책을 사버리는 것도 그렇고 해서 마침 읽고있던 작가의 근작을 사서 헷갈리는 맘을 다잡기로 한 거죠. 그러고보니 몇 년 전에도 윤성희 작가가 수상했던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서점에서 보고 있다가 윤작가의 단편집을 사들고 집에 왔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지금 찾아보니 제가 윤작가를 처음 접했던 그녀의 첫 작품집은 절판되버렸군요. 그녀가 장편으로 점프하지 못하는 것과 맞물리면서 왠지 잊혀지는 작가가 될가봐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왠지 커피 한잔만큼은 미안해지기도 하고요.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