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궁전, 하와 마할

2005년의 새해를 맞이한 곳은 인도의 핑크시티 자이뿌르였다.

인도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델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자정이 되기 두어시간 전이었는데, 새벽에 출발할 기차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될 무렵이기도 했다. 기차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전화가게에 들러 쓸쓸히 새해를 맞으실 부모님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인도는 아직 2004년이었다.

내가 예약해놓은 기차는 일반적으로 배낭여행자들이 이용하는 SL 클래스가 아닌 2A 클래스였다. 하나의 컴파트먼트의 양쪽 벽에 3개씩 총 6개의 간이침대가 설치된 SL 클래스와 달리, 2A 클래스는 더 넓고 깨끗한 간이 침대가 벽에 2개씩 총 4개가 설치되어있고 게다가 에어컨에 식사까지 나온다. 화장실 역시도 뭔가 묻을 것 같아 쪼그리고 앉기 어렵게 만드는 SL 클래스의 그것과는, 일단 앉지 못할 거부담이 없다는 정도로 달랐다.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껴서 타는 현지인들과 섞여야 하는 SL 과 달리 내 공간을 침범하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2A 클래스 표를 사는 현지인들의 카스트(?)가 달라서 되려 내가 천민인 것 같은 미안한 느낌마저 든다. 한마디로 인도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황송한 여행이 가능하다. 기차삯도 2A 는 SL 보다 두 세 배 이상이다. 그렇다고 돈으로 서로 다른 카스트를 넘어 설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거기서 외국인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SL 이 아닌 2A 클래스를 선택한 이유는 그런 안락함(?) 때문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 자정 넘어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기차시간까지 숙소에서 머물다가는 자이뿌르의 비싼 숙박비 하루치를 더 부담해야 할 판이었다. 전 날 새벽에 체크인했음에도 자정을 넘기면 돈을 더 내야한다고 융통성 없이 구는 숙소 리셉셔니스트에게 맘이 상해버렸다. 자정 전에 체크아웃을 하게 된다면 그 시간에 딱히 갈 곳이 없었고, 결국 화장실과 샤워시설까지 있는 --- 그런 게 있어도 별로 이용할 것 같진 않지만 --- 깨끗한 대기실(waiting room)이 제공되는 2A 클래스를 예약한 거다. 어차피 비싼 자이뿌르의 하루 숙박비를 보태면 SL 에서 2A 로 점프가 가능했으니 기회비용을 따졌을 때 2A 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마지막 행선지 델리를 앞두고 인도사람들에게 상당히 피곤해져있었다. 그래서 2A 클래스 열차는 여행에 지친 나를 달래는 일종의 장치 같았달까. 인도의 기차역에서는 마치 추석 귀성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울역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양반이다 싶게 여겨질만큼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 걸 보게 된다. 그렇게 또 현지 사람들 사이에 시선을 받으며 둘러쌓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연착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기차를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고보니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건 바로 휴식이고 위로였다. 아마 그시점에 새해를 맞으며 부모님 생각이 났던 것도 그 연장선에 있었던 듯. 일반 대기실이 아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의 기다림은, 비록 그 안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심심하긴 했지만 의도하지 않은 휴식이 되어준 것 같다.

꽤나 빡빡했던 여행 일정 속에서 이제 코 앞의 델리행 기차를 놓치지 않는 것 외에도 내겐 해결되지 않은 걱정거리 하나가 남아있었다. 나는 과연 델리에 도착해서 트리베니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 시타르를 건내받을 수 있을까!

트리베니 뮤직센터에 처음 갔던 날 시따르를 주문하면서 돈을 지불할 때 레디시는 내가 바라나시를 떠나기 전에 악기를 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케이스 제작을 이류로 한 번 미루고 두 번 미루더니 결국 받지 못하고 바라나시를 떠날 판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하며 화가나기까지 했다. 인도는 당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약속이란 건 있지도 않을 뿐더러 해도 믿을 것이 못되는 곳이란 걸 되새기게 됐다. 그리고 그건 인도 사람들에게 피곤함을 느끼는 이유중 하나였다. 

내가 할 말을 잃고서 난감해하자 레디시는 내게 앞으로의 행선지를 물었다. 다른 도시들을 며칠간 돌다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델리로 들어갈꺼라고 했더니 델리에 머무는 날에 맞춰 숙소로 사람을 보내 내게 악기를 건내주겠단다. 그러면서 운송료로 2000루피를 요구했다. 일단 그 운송비란 게 상당한 금액이었고 악기 출고를 미룬 게 그들임에도 운송비를 내가 부담해야하는 상황도 따져묻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 악기를 인편에 전해주겠다는 그 말을 믿어도 될지가 내겐 가장 큰 의문이었다. 만약 그게 사기라면 나는 너무나 바보 같이 행동해서 어디 말하지도 못하는 창피함을 인도에 대한 상처로 가져야 할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행내내 커다란 시따르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건 되려 다행이었고, 또 나흘간 매일 트리베니로 레슨받으러 다니면서 봤던 그들과 얼굴 붉혀가며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냥 환불을 요구해서 시타르를 사오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던지, 밑도 끝도 없는 약속을 받아들이던지 둘 중 하나였다. 낯선 곳인 델리에서 누군가와 접선을 시도해야하고 실패하면 더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도 컸지만, 결국 2000루피를 더 줘버렸다. 뭔가 모를 좋은 기운에 이끌려서 그들과 믿지 못할 약속을 해버린 거다. 영수증이야 받았지만 이틀 머문 후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델리에서 그런 게 무슨 소용있겠나. 더구나 인도에서.

그런 사연이 델리에 들어가면 뭔가 일이 벌어질 꺼란 긴장 섞인 불안감을 피워냈고, 난 그걸 차분히 눌러가면서 자이뿌르 기차역 대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델리보다 더 '관광사기업'에 집중하는 아그라와 자이뿌르에서 나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시도하는 인도 사람들로부터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한적함을 즐기고 있었다. 나 말고도 한 무리의 현지들 서넛이 거기 더 있었지만 난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참동안 정적이 유지되나 싶었을 때 그들이 갑짜기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번갈아 얼싸안으며 큰 소릴 내기 시작했다. 자정이 되어 그들끼리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있음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럼없이 내게도 새해 인사를 건내며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들과 말문을 트게 됐는데, 그때만큼은 그들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그들의 새해 인사가 의외로 내게 커다른 위안이 됐던 것 같다.

인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은 후로, 난 외로웠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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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나오면서 천가방을 술집에 두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인도 여행중에 산 이후로 지금까지도 즐겨 들고다니는 천가방이었다.

"왕걸레 가져가셔야죠."

술집 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가던 나를 뒤쫓아나온 여자 종업원이 그렇게 불러세웠다. 그녀에게 내 가방은 '왕걸레'로 보였나보다. 물건을 잊고 나온 쑥쓰러움과 그녀의 '왕걸레' 소리에 웃음이 났다. 그순간 트리베니 뮤직센터 생각이 났는데, 내가 거기서 봤던 파파그루의 가방 역시 처음엔 왕걸레로 보였던 탓이다. 지금의 내 것보다 훨씬 더 걸레에 가까웠던 그 가방이 탐이나서 결국 같은 걸 사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왕걸레'라는 표현이 기가 막히면서도 반가웠다.

바라나시에 머물던 중 하루는 파파그루가 매고 있던 천가방이 눈에 띄었다. 걸레같은 모습이었지만 묘한 매력을 느꼈기에 결국 파파그루에게 어디서 샀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의 짧막한 대답은 알아듣기에 아리송했다.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다시 질문했는데 그제서야 아들 레디시를 불러 뭐라고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레디시는 나중에 자기 딸을 따라가보라고 통역하듯 알려주었고, 결국 난 할아버지에게 질문하고 대답은 손녀에게서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다지 삼대를 기다려서 깨달아야 할만한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날의 시타르 레슨이 끝난 후 파파그루의 손녀딸은 나를 데리고 겐지스강 주변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쳐갔다. 그리고 어느새 우린 옷과 첫가방 만드는 상점에 도착했다. 그곳을 찾아가는 길에 나에게 한마디도 건내지 않은 채 그저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뒤를 돌아봄으로써 따르는 나를 인도하던 그아이는, 상점 주인에게 뭐라고 몇마디 말하곤 돌아서더니 나에게는 내가 찾는 곳이 여기라는 눈짓만을 남기고서 돌아서려고 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삼대를 기다렸음에도, 결국 현자를 만나게 해줬으니 또다시 깨달음을 빌어보라는 거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우린 그렇게 통했다.

난 그 깜찍한 아이에게 주머니에서 5루피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인도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도움으로 응당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이의 길안내 심부름이 무척 기특하고 똘똘해보였던 이유가 더 컸다. 다시 말해 그건 댓가성이라기보단 나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그아이는 싫다는 손짓을 하더니 내가 다시 권할 틈도 주지 않고 망설임 없이 나를 지나쳐 돌아가버렸다.

그순간은 나에게 정말 충격이었다. 주는 돈을 받지 않는 것도 낯설었거니와, 인도에서 처음으로 댓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을 받았기 때문일 거다. 같은 날 오전에 트리베니를 찾아가던 길을 헤매다 (그곳을 찾아갈 때마다 헤맸다. 물론 돌아올 때도 헤맸다.) 우연히 만났던 여자아이와도 대조되어 더욱 그랬다. 그 아이는 자기 사진을 찍으라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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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불러 세우고는 옆에 묶여있던 염소를 끌어안고 포즈를 취하더니 결국 내가 예상했던 바대로 돈을 달라고 했었다. 인도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그런 식이다. 귀찮게 따라다니며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달라고 조르거나 내가 바라지도 않은 친절을 쏟아내고는 결국에 가서 손을 내밀곤 하는 꼬마아이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둘러쌓이다시피하여 길을 거닐다보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게 되는 일조차 피곤함으로 다가올 때가 생긴다. 그런 피곤함도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때 별다를 게 없어보이는 여자아이 하나에게서 느꼈던 게 바로 휴식같은 친절이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그 트리베니의 소녀가 머뭇거림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을 때 나는 멍해져버렸다.

그리고 그건 이 왕걸레스러운 천가방이 아직도 내게 소중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술집 종업원의 '왕걸레'라는 장난스런 부름에도 난 기분 상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친절'에 감사할 뿐이다. 물론 그녀가 부르지 않았더라도 바로 찾으러 들어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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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은 파파그루(Papa Guru; 아빠 선생님이란 뜻)와 아들 레디시, 딸 케롯, 그리고 어린 손녀딸이었다. 비지니스는 주로 레디시가 맡아하고 파파그루와 케롯은 레슨과 공연연주를 주로 하는 것 같았다. 딸은 부드러운 인상에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말은 한 마디도 안하면서 시따르 연주에서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어 신비한 인상을 풍겼다. 손녀딸 역시도 어린 나이에 상당한 솜씨를 보였다. 따블라를 주로 연주하는 레디시까지 그렇게 넷이서 낮에는 레슨을 하고 저녁 땐 공연을 하는 곳이 트리비니 뮤직센터다.


사진은 나에게 나흘간 시따르를 가르쳐주신 파파그루. 영어를 다 알아듣는 것 같긴 하면서도 대답은 무척 짧게 하고, 레슨중에도 잘한다는 말 외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직접 보여주고 손짓하고 잡아주고 그림으로 그려가며 열씸히도 가르쳐주셨다. 금방 친근감이 생기는 할아버지 외모인데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 봤던 만화 '드레곤볼'에 나오는 '거북신선'을 똑 닮아서 더욱 그랬다. 그의 한시간 레슨비용은 100루피. 그돈은 인도사람의 노임치고는 엄청나게 비싼편이다.

시따르 악기까지 하나 주문해놓은 마당에 레슨비 100루피는 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도의 모든 곳에서 통하는 흥정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에 아무말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돈으로 치면 그다지 비싸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델리에서 레디시를 다시 만나 그의 이야길 들었을 때, 그땐 되려 흥정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곳에서의 며칠간 내가 의아해하며 느꼈던 것처럼 트리베니는 인도 안에 있지만 인도가 아닌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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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베니 뮤직센터(Triveni Music Center)는 바라나시에 머무는 나흘 동안 매일 찾아갔던 곳. 첫날 찾아갔을 때 시타르(Sitar) 하나를 주문했고 그후로 나흘간 찾아다니며 시타르 레슨을 받았다. 그곳은 1층이 공연장 및 강습소였고 옥상은 레스토랑으로, 중간 층들은 장기 강습생들을 위한 도미토리 및 연습실로 사용되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의 '공연장'이나 '레스토랑' 등을 떠올리면 엄청난 착각이다. 한번은 오전에 레슨을 받고서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자기들 옥상에 테라스 레스토랑의 전망이 좋다고하여 올라갔었다. 그런데 음식을 어디서 배달시켜서 내오는 건지 엄청 늦게 나왔고(인도니까 늦는 건 상관 없다), 게다가 날파리들이 나눠먹자고 달려들다가 스스로 건더기가 되어준 덕분에, 아직 닭의 로망도 모른 채 유명을 달리했을 병아리로 의심되는 자의 다리가 담궈져있는 치킨커리를 더욱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외국인들은 날파리들을 건져올리고 있는 나에게 단백질이니까 그냥 먹으라고 했다. 그들역시 그러다 포기했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바라나시의 미로와 같은 골목길에서 어딘가를 찾아간다는 건 발길 닿는 데로 떠돌다가 우연히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트리베니 뮤직센터 역시 우연히 만나게 될 때까지 떠돌아야 한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무척 헤매야 했다. 그렇게 헤매던 중에 골목길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던 어떤 여자분이 있었는데 왠지 찾는 바가 같을 것 같아 불러 세운 후 같은 깨달음을 향해 동행했고, 그렇게 우린 함께 트리비니에 찾아 들어서게 됐다. 그곳의 내부가 무척 어두침침했기 때문에 첫인상에 호감이 가질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타블라를 만들고 있던 이는 상대적으로 밝은 입구쪽에 나와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안에는 인도식으로 꼬르따와 펀자비를 곱게 차려입은 일본인 커플이 한 쌍 앉아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여기 이후로도 계속 낯선자일 것을 암묵적으로 합의했던 건지,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더욱 낯선 기분을 하고서 카페트 위에 앉아 누군가 접대해오길 기다려야 했다.

인도에 도착해서 바라나시로 들어가기 전까지 인도사람들은 나로하여금 그들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 선입견은 그들의 친절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하거나 그들의 언행에 어떤 의도가 있을 꺼라는 생각을 하게끔 했다. 그때문에 여행중 무척 지치기도 했는데 트리비니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했다. 그곳은 내가 인도라고 부르던 곳에서 동떨어진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고, 처음엔 그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은 결국 나에게 또다른 인도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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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할 때 일어난 Jack 은 갠지스강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자며 내 방문을 두드렸다. 잠에서 깨어 문을 열어주자마자 그에게 끌려나온 나는 우리가 머물던 샨띠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으로 향했다. 그 추운 밤동안에 계단이나 복도에서 아무렇게나 걸처져 자고 있었던 샨띠의 종업원들을 피해 옥상까지 오르는 길은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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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올랐을 때, 순간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던 건 아직 중천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던 보름달이었다. 그 달이 너무도 밝아 나로써는 이미 해가 떠버렸는 줄 알았던 거다. 저렇게 높게 떠있는 달이 땅 아래로 내려와야 태양이 고개를 내밀꺼란 생각을 하니 나를 너무 일찍 깨운 Jack이 약간 원망스러워졌다. 추위에 떨며 일출을 기다리기보다 달이 지길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달이 태양과 정 반대에 있을 줄 알았던 건 잘못이었다. 달은 땅 아래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그보다 먼저 떠오른 태양에 빛을 잃듯, 밝아진 하늘에 녹아 없어진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날은 Jack 이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린 아침먹기 전에 강가에 나가 일출을 보며 함께 배를 탔다. 그때서야 우린 처음으로 다시 만나자 했다. 하지만 그건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객들끼리 주고받는 끝인사를 닮은 첫인사 같은 말이었을 뿐. 그 말이 지켜지게 될지, 지켜지게 되더라도 얼마나 오래 갈 인연인지는 우리가 탄 배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그는 기차 출발시간 전까지 그의 짐을 맡아줄 곳이 필요했다. 아침식사 후 나는 따로 가야할 곳이 있었기에 그에게 내 방에 짐을 놓고서 열쇠를 가지고 나가라고 했다. 짐을 찾으러 돌아왔을 때 방문을 다시 잠그고 열쇠는 약속한 곳에 숨겨놓도록 하면 됐다. 우린 다시 한번 다음을 기약하고서 그렇게 헤어졌다.
 
빤데이 가트로부터 시작해 매번 골목을 헤매야만 발견할 수 있는 트리비니 뮤직센터에서 시타 레슨을 마친 후 다시 한 번 강을 따라 가트들을 거슬러 돌아가 저녁 무렵이 되서야 샨띠로 돌아왔다. 그는 역시 떠나고 없었다. 왠지 손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떠났을 걸 알고 있었지만 잘가라고 미리 인사를 해버린 우리의 헤어짐이 나에겐 그의 부제를 확인하면서 그런식으로 또 한번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마치 다른그림찾기와도 같았다. 아침에 그와 함께 방을 나서면서 그의 가방이 침대 옆에 놓여있음을 보고 방문을 닫았다가, 저녁 때 돌아와 다시 열었을 땐 놓여있던 가방만 없어진 "다른 그림" 말이다. 이별이 바로 그런 거라니, 다른그림찾기 같이 아주 단순한 변화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은 약간의 위로가 되어줬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는 그의 배낭이 없어진 것 말고도 다른 것이 또하나 더 있었다. 과일 한 알과 함께 그가 남긴 노란색 포스트잇 메모. 거기엔 다시 만나자며 "아구바" 한 알을 놓고간다고 써있었다. 사실 그 과일의 이름은 "아구바" 가 아니라 "구아바"였다. 그가 낯선 곳의 노점에서 이름 모를 낯선 과일을 사먹다가 처음엔 낯설었던 나와의 작별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싶어 메모를 적고 있었을 때, 그는 어렴풋이 잘 기억나지 않는 과일 이름을 애써 떠올리다가 "아구바" 라고 적었겠구나... 살포시 웃음짓게 되면서 그후로 오랫동안 우리가 친구가 되리란 걸, 아까 배 위에선 알 수 없었던 걸 그순간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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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