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노트북 들고서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를 찾아갔습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포스터가 걸려있길래 표를 사고서 바로 옆의 카페 themselves 에 들어가서 노트북 켜고 무심하게도 예매한 영화 정보는 찾아볼 생각도 안하고 9월 말에 출발할 여행 계획이나 짜고 있었죠.
극장에 들어섰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빈자리가 거의 없었고 게다가 관객들이 거의 다 여자였기 때문이었죠. 영화가 시작되기 전, 소녀들의 수다에 시달려가며 이게 무슨 일일까 싶어 두리번거려봤지만 정말 남자 한 마리 찾기가 어렵더군요. 알만한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로 물어보니 아라시 라는 일본 아이돌이 주연을 맡았기 때문일꺼란 답장이 와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5분, 왠 애들이 어른 흉내 내면서 연기하는 게 어색해보였지만 영화는 중반 이후로 들어서면서 그냥그냥 볼만했습니다.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에 비하자면 좀 그랬지만 모든 작품이 다 환상적일 수는 없는 거죠. 하지만 주연배우들이 극중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을 꾸고 사랑에 실패하고 다시 꿈 앞에 절망하는 모습인데, 그런 모습들을 소화하기에 나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누가 봐도 꿈 앞에서 절망하기엔 너무 어려보이기 때문에 진실성이 떨어진다고 할까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 올라갈 때, 심취한 영화에 대한 반응으로 보기엔 오버스러울만큼 거의 예외 없이 자리를 뜨지 않은 소녀들을 보고있자니 아다린지 아라신지에 대한 충성심이 느껴지면서 왠지모를 오싹함이 전혀지더군요. 아마 뭔가에 홀려있는 종겨집단 집회 한가운데 나혼자 이단이어서 발각되면 밟힐 것 같은 그런 공포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이 켜지자마자 벌떡 일어나고 문밖을 나서려고 하는데, 불이 켜져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관객들을 보니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더군요. 불이 켜져도 정신 못차리고 있다면 혹시 영화보면서 팔걸이에 뽄드라도 꽂아놓았던 걸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죠. 문을 나서려는 순간 이누도 잇신 감독이 극장 안으로 들어섰거든요. 모르고 있던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예정되어있었더군요. 그 극장 안에서 나만 모르고 있던 게 아라시 뿐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극 중 아다리의 어떤 멤버 하나가 여자출연자와 합궁한 걸로 해석해야하냐 아니냐 따위를 물어보는 소녀들 사이에 쬐그맣게 구멍나있는 제가 앉았던 자리에 다시 엉덩이를 꼽아넣었습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 참 재미있는 사람이더군요. 함께 무대에 선 스폰지하우스 대표도... 감독과의 대화 시간 전에 이누도 잇신 감독은 영화 "괴물"에서 처음 괴물이 출현했던 한강시민공원을 찾아가 영화에서처럼 돗자리 펴고 맥주랑 오징어 씹었다고 합니다.
어려서 봤던 5부작 동명타이틀의 드라마에 대한 감동 때문에 영화화 했다는 감독이 "젊음에 대해서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지만 인생에 대해서는 이기고 지는 게 없다" 라고 말하면서 원작 만화와 드라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을 때 영화와 함께 큰 공감대를 이루게 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