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사용하던 맥북에어가 부팅이 되질 않았습니다. SSD 가 고장이어서 부품을 사다가 바꿔주니 다시 살아나기는 했는데, 그렇게 복구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죠. 그사이에 사용할 대체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참에 최신 맥북으로 바꿀까 생각했지만 돈이 아까웠습니다. 09년 맥미니, 10년 맥북을 사용하면서 불편을 끼치는 문제는 메모리지 CPU 가 아니기 때문에 엇비슷한 성능의 CPU를 가지고 디자인이나 디스플레이 개선해가며 나온 이후의 모델들에 그다지 끌리질 않았거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더미 터미널(dummy terminal) 처럼 사용할 수 있는 랩탑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크롬북을 만나게 되었죠.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이 마치 새로운 패러다임인 것처럼 이야기되면서도 아직은 범용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이름이 달라졌을 뿐 유사한 개념의 컴퓨팅 환경은 이미 80년대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렴풋이 알기로 그당시 MIT 에서 IBM 과 함께 아테나 프로젝트란 걸 했었는데, 캠퍼스 안에서 교육용 분산 컴퓨팅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작되어 LDAP, Active Directory, 메신져서비스 등이 만들어졌고 그뿐만 아니라 더미 터미널과 X윈도우도 그때 만들어진 거라고 합니다.
오래전 학교 컴퓨터실에 SPARC Xterminal 이 두어대 있었는데, 아무도 사용하질 않았기 때문에 주로 저와 몇몇 사람들만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하드디스크는 커녕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고, 켜봐야 텍스트 환경이어서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사용되기 어려웠죠. X윈도우를 띄우면 넷스케이프 같은 응용프로그램들도 몇개 쓸 수 있었지만 그역시 서버에서 윈도우 디스플레이를 터미널로 돌리기 위한 환경변수를 설정해줘야 했기 때문에 유닉스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만 사용했던 겁니다. 그덕에 프로그래밍 숙제 마감날짜가 다가오면서 PC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었죠.
대충 이것과 비슷하게 생긴 터미널이었습니다. 입출력장치로는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가 있고, 본체에는 HDD 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도 없이 단지 X서버만을 내장해서 리모트데스크탑 같은 기능만을 할 뿐이죠. | 지금은 리눅스에도 화려한 윈도우가 대중적이지만, 당시엔 X11 API 또는 Motif 프레임워크로 윈도우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는데 기본적인 위젯 이외에 꾸밀 수 있는 게 없었죠. |
정확히 따지자면 이런 컴퓨팅 환경은 Thin Computing 이지 분산컴퓨팅은(Distributed Computing) 아닙니다. 분산컴퓨팅 환경이란 어떤 커다란 계산을 하거나 혹은 특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여러 컴퓨팅 노드들이 활용되는 개념이지 사용자가 그러한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원격에서 접속하는 것까지를 범위에 넣지는 않습니다. 반면 Thin Computing 이란 다른 노드에 의존적인 클라이언트를 통해 서비스를 이용하는 환경을 의미하기 때문에 위에서 소개한 X terminal 은 분산컴퓨팅이기보다 Thin Computing 환경이었다고 말해야 맞겠죠. 그리고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이란 말도 앞서 둘의 개념들과 교집합이 있을 뿐이어서, 사용자에게 서비스의 인터페이스만을 제공할 뿐 사용자의 연결 방식을 Thin Computing 으로 제한하지도 않고, 서비스 내부적으로 분산환경이라 해도 그것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인터페이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구름과 같은 모호성을 갖는 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클라우드 서비스는 반드시 분산컴퓨팅으로 제공될 필요도 없고 사용자 역시 다양한 노드를 통해 동일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데서 결을 달리 하는 개념인 거죠.
사실 제가 경험해본 Thin Computing 은 앞서의 X terminal 보다 더 오래 되었습니다. 하이텔단말기가 그 앞에 있었죠. 하이텔 단말기는 90년대 초부터 PC통신 하이텔의 보급과 함께 한국통신에서(현 KT) 마치 메가패스 ADSL모뎀 대여하듯 보급했던 단말기 입니다. 오로지 하이텔 서비스만 이용할 수 있었고, 깡통이기는 X terminal 과 동일했죠. 짐작이지만 내부 구조나 구동 SW 도 X terminal 과 거의 유사할 겁니다. 다만 랜선 대신 전화선을 연결해서 원격 UNIX 환경에 구동되어있는 하이텔에 접속해서 텍스트 기반의 화면을 보여주는 거죠. 한국의 PC 보급은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이뤄졌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모뎀 통신하던 시절에 하이텔 서비스의 이용을 늘리기 위해서 더미 터미널을 보급했던 거지요.
하이텔 단말기 출처 : http://zecca.tistory.com/114 | 프랑스 미니텔 단말기 출처 : https://flic.kr/p/9XLdSE |
그런데 사실 하이텔단말기는 프랑스의 미니텔을(minitel) 따라한 겁니다. 1978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미니텔이야말로 Thin Computing 의 시초가 아닐까 싶은데, 프랑스텔레콤은 장기적인 성장안으로 영국까지 사업영역을 넓힐 계획도 만들었었고 미국에도 퍼뜨릴 생각이었다죠. 아마 그와중에 한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거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90년대에 시작된 하이텔단말기가 존재감이 없었던 것에 비해 미니텔은 90년대 2천5백만명까지 이용자가 증가했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미니텔이 불과 2년전인 2012년에 사업을 접었다는 거죠. 한국에서 하이텔 단말기는 2013년에 방영된 응답하라1994 같은 드라마에서 추억하는 대상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거죠. 미니텔의 서비스 종료 당시에도 약 60만명의 사용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꽤 오랜시간동안 애플의 컴퓨터들만 사용했던 것은 디자인이 좋아서도 성능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개발용 랩탑이란 말도 있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애플 기기들의 매력은 여러개를 한꺼번에 사용할 때 비로서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기기들간의 연결성 때문에 저는 애플의 제품들을 애용해왔습니다. 애플의 제품들에는 꽤 오래전부터 어떤 철학처럼 구축되어온 기기들간의 연동 컨셉이 있는데, 그것이 처음엔 개인 클라우드 환경이었다면 mobile me 와 이후 icloud 가 등장하면서 더 큰 범위로 확장되려는 시도가 있은지 벌써 오래 되었죠. 그러다가 스티브 잡스가 죽고 그 철학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음을 하나 둘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 이후의 애플을 의심하게 되었고, 메버릭스(OS X 1.9) 업데이트를 하지 않고 마운틴 라이언을 쓰고 있으며 iOS 역시 6버젼에 머물다가 앱들의 지원이 안 따라줘서 불과 얼마전에 어쩔 수 없이 7버젼으로 갈아탔을 정도로 애플이 유지해왔던 컨셉을 좋아했었습니다. 아마도 얼마전 맥북이 고장났을 때 최신의 맥북으로 대체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겨났던 이유로 한몫을 차지하기도 하겠죠. 1
HP Chromebook 11
그러다가 크롬북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터미널 랩탑이더군요. 어차피 무거운 작업들은 서버에서 처리할 것이므로 랩탑은 큰 저장공간이나 빠른 CPU 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이런 Thin Computing 장비는 하이텔이나 미니텔이 그랬듯 특정 서비스 이용을 위한 단말기일 뿐이어서 인터페이스가 폐쇄적입니다. 애플 제품과의 직접적인 연동성까지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네트웍드라이브 지원이라도 해준다면 어떻게든 연결해서 사용하겠지만 그야말로 구글드라이브 아니면 USB드라이브만이 저장매체로써의 대안이죠. 그렇게 스토리지 서비스만 아니라 그밖의 각종 컨텐츠 등도 구글의 서비스만을 향하고 있죠. 이런 폐쇄성을 사용자들이 '개선'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그건 착각일 뿐입니다. 하이텔에 접속하기 위해 보급시킨 하이텔단말기로 나우누리나 데이콤에도 접속할 수 있도록 01420, 01433 등 전화번호를 지정할 수 있게 개선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 크롬북이 폐쇄성을 '개선'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었다면 어쩌면 다음에 나올 랩탑은 크롬북과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요? 자꾸 더 작게 만들어서 줄줄이 이름에 "Air" 붙이는 것도, 줄줄이 레티나 디스플레이 달아서 새제품이라고 발표하는 것도, 인텔의 저전력 하스웰 CPU 심고서 롱라이프를 자랑하는 식으로 작금의 애플 같지는 않았을 테니 컨샙을 바꾸는 시도가 분명 있었을 법 하고, 비록 구글이 먼저 시작하긴 했어도 icloud 를 포함한 제품들간의 연계를 극대화시킨 형태의 랩탑과 태블릿의 중간 어디쯤의 하드웨어가 나오잖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저에겐 바로 그런 게 필요한데 애플의 제품들이 조금씩 엉망이 되어가고 있으니 어쩌면 크롬북을 시작으로 애플과 멀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 OS X 가 유닉스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해서 그것이 유닉스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같은 BSD 기반이었다가 나중에 System V 에 기반했던 SunOS 랑 비교해도 다른 점이 무척 많죠. System V 기반인 HP-UX 와 IBM AIX 역시 서로 너무 달라서 SunOS 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을 HP-UX 또는 AIX 에 포팅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걸 생각했을 때 OS X 는 독자적인 개발환경을 갖고 있음에도 리눅스 개발자들에게 환영 받는 것은 그것이 유닉스 기반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건 아마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