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 Little White Book2006. 5. 16. 00:40

처음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김연수가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새 책을 기다렸으나 새 책이 나오질 않아서 그가 쓴 글 대신 그가 선택한 글이라도 읽자는 것이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 이유는 책 맨 마지막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 중에 적혀있다.

"현대 사회가 말하는 편리함은 사실 편리함이 아닌 것이다. 시간을 단축시켜준다는 컴퓨터는 오히려 시간을 더 빼앗았다. 자동차와 전철의 등장은 통근거리를 최대 두 시간까지 늘렸다. 아파트 생활의 즐거움은 적어도 10년간에 걸친 융자금 납부라는 올가미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융자금을 갚고 노후를 보장 받기 위해 평균적으로 매일 한 시간씩 멍한 정신으로 출근하고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도 또 저녁이면 원치 않은 술자리에 나갔다가 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혼 가정은 늘고 아이들은 길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이건 분명히 미친 짓이다."

평상시 내 생각을 그대로 적어놓았더라. 딱 저만한 생각을 가지고서 이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책을 읽는 내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너무나 급진적으로 현대 사회를 외면하는 아미쉬들 역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실적인 대안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역자의 글 따위는 안 읽었는데 책을 덮기 전 김연수의, 진짜 김연수의 '옮긴이의 말'을 읽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책 내용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구절은 안타깝게도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에 인용된 시 "A Place in Space" 의 한 문장이다. 뭐 그것도 책 안에 있으면 책의 내용이긴 하겠다.

"한때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라 여겼던 그 행성이 고작 우리 두 손 안에서 터지고 있네"

역시 김연수의 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 대승적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6. 4. 24. 11:54

정말 오랜만에 기타를 잡아봤다.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네 걸음만 걸어가서 옷장에서 하드케이스를 꺼내 열면 되는 건데, 마지막으로 그렇게 했던 게 언제인가 싶을만큼 까마득한 일이 되버렸네.

악기를 안고서 6번줄부터 1번줄까지 훑어내렸다. 디리링~ 해야할 소리가 드리룽~ 하고 들리더라. 조율한지 오래 되서 줄이 늘어난 소리. 순간 내 방은 어렸을 때 어머니랑 함께 놀러가곤 했던 외할머니 댁의 어두침침하고 서늘한 다락방으로 변해있었다. 할머니 방의 아랫목 병풍 뒤에 숨겨진 작은 문을 열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통해 들어갔던 그곳, 나에겐 신기하게만 보였던 갖은 잡동사니들이 쌓여있던 다락방에 내가 다시 와있었다.

갈 때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재밌는 물건들이 가득한 곳에서 외삼촌이 쳤다던 통기타를 발견했다. 비닐케이스를 벗겨보니 줄이 한 두 개 끊어져있었다. 나름대로 폼을 잡고서 6번줄부터 1번줄까지 훑어내렸다. 그리고 또다시 드리룽~ 그 소리가 조율 안된 소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고 또 조율할 줄은 더더욱 몰랐던 어린 나로 돌아가, 할머니의 다락방에서 기타를 조율하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곡 하나를 떠듬떠듬 연주해봤다.

아마 외삼촌은 다락방에 버려진 그 기타를 다시 조율하지 않으셨을꺼다. 부모님이나 외할머니를 통해 들어온 외삼촌의 갑갑한 삶이 그걸 알게 해준다. 어쩌면 말이다, 오늘 내가 오랜만에 이렇게 기타를 잡지 않았더라면 내 누이의 아이가 (조카가 생기기 전에 시집부터 갔으면 좋겠다.) 훗날 조율 안된 내 악기를 만지면서 한 껏 폼잡을 날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지. 아마 외삼촌의 기타가 다락에 들어가기 전에 외삼촌은 오늘의 나처럼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슬며시 잊어가다가 바쁘게 삶을 쫓아가셨던 거다.

다행이다, 다시 조율하게 돼서.

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