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 같은 눈물, 난 딱 한 번 본적이 있다.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 앉은 어머니의 울음이 그랬다. 해일이 뭔지 모르는 내게, 그 순간에 그게 해일이었다.



에페스 유적지에서 다시 셀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적지 후문에서 한글이 적힌 성지순례단 관광버스를 발견하곤 그걸 얻어탔었다. 무임승차에 귀동냥까지 하려니 괜히 미안해져서, 그 뻘쭘함을 견디기 위해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셀축과 에페스 사이에 위치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옛 터를 지날 무렵 인솔자가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여러분들 왼쪽에 보이는 곳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터 입니다. 지금은 다 부서지고 터만 남았는데, 여러분들이 내렸던 에페스에서 보셨던 것들 중 일부는 이곳에 있던 것들을 옮겨다 놓은 것들이기도 해요. 자, 이렇게 여러분들은 오늘 세 곳을 보신 겁니다. 처음에 들르셨던 게 성모마리아의 집이었고요, 에페스를 거쳐서 들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인솔자의 그런 안내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의 말로 짐작컨데 아마 이들은 이 버스를 타고 성모마리아의 집을 거쳐서 에페스의 유적지로 왔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이곳에 성지순례를 오셨을 때 이런식으로 다니셨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머니께서 언젠가 말씀하셨던 성모마리아의 집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로써는 차편이 마땅치 않아 가보지 못했던 곳을 이들이 오늘 방문했다는 사실. 그곳에서 내가 확인해보고 싶었던 어떤 것을 이들이 봤을까 싶게 만들었다. 어머니께서 성모마리아의 자취를 쫓으셨던 것처럼, 어머니의 자취를 쫓아 성모마리아의 집을 가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지기도 했다.



몇 해 전 그날은 어머니께서 터키와 그리스로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후의 부활절이었다. 부모님과 난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막 식사를 마쳤는데, 날이 날인만큼 어머니께서 당신의 성지순례 경험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그의 제자 요한이 성모를 에페스로 모시고 와서 살게 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신자가 아닌 내겐 길어질 수록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데 에페스 유적지 뒷편 산자락에 위치한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던 이야기만은 경우가 좀 달랐다.

성모마리아의 집 안에서 보셨다는 성모마리아상은, 보통은 순백인 것이 너무 당연한데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얼굴만 검은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단다. 종교가 없는 나라면 도둑질 당한 성상의 일부를 다시 만들어놓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다거나 하는 세속적인 이유를 짐작했을텐데 어머닌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해석을 하신 것도 아니었다. 어머닌 성모마리아의 검은 얼굴에 대해 '어머니'로써의 공감을 녹이셨다. 십자가에 못이 밖혀 메달린 자기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라면 그렇게 얼굴이 시커멓게 되고도 남을 꺼라는 거다. 당신의 그런 말씀은 한편으론 말도 안된다 싶긴 하지만 그건 이해나 공감 따위보다 차라리 성모와의 인간적인 합치 같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던 순간에,  아니 '순간'보다 더 짧은 시간,  당신의 말씀을 별 관심 없이 들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난, 뭔가 엄청나게 쏟아질 것 같은 기운을 느낀 채 당신의 얼굴을 바라봤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씀을 꺼내시면서 해일 같은 눈물이 당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고있다가 문득 당신의 눈물이 떠올라 버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낯선이에게 묻고 싶어졌다.

"성모상의 얼굴이 정말 검은 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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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스의 고대 도시 유적에서 만난 고양이. 웅크리고 앉아 노려보고 있는 이친구에게 식당에서 챙겨놨던 빵을 뜯어 던졌다. 하지만 멀지 않은 내 앞에 던져놓았고 기실 그건 일종의 거래 같은 거다. 빵을 거저 주는 게 아니라 실은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의 댓가로 주는 거다. 나조차도 빵이 바닥에 떨어져 미끼로 변하는 걸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그 거래의 의미를 알아 차렸는지, 이친구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빵을 집어 오물오물 먹었다. 그다음 손바닥에 물을 담아 그에게 내밀면서도 그걸 핥아 마실꺼라고 기대하진 않았었는데, 이친구의 대범한 행동은 나를 놀래켰다. 그때까지 내 손바닥에 올려놓은 무언가를 먹는 고양이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 손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내 손 위에 있는 걸 먹지는 않는데... (글 쓰고서 다시 테스트해보니 내 고양이도 손에 있는 걸 집어먹긴 한다. 짜식, 지긴 싫었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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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고대 도시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고양이일지도 모르겠다는 동화같은 생각을 해봤다. 이 곳에 사람이 살던 시절에도 이친구는 여기 살면서 사람들 다리 사이를 피해다니며 먹을 걸 구하러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꼭 이 친구가 수천년을 살아왔음에도 억울하게도 꼬리가 하나밖에 없을 뿐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 그동안 엄청 많은 할아버지 고양이들이 방만하게 씨를 뿌리며 힘겨운 환생을 거듭해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오랜 세월동안 이친구가 배우고 길러온 사람을 대하는 요령은 겨우 몇십년 산 나보다 훨씬 나을테고, 이제 그 오랜 숙련으로 낯선이의 손바닥에 담긴 물도 마실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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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서점에서 읽었던 어느 일본 작가의 그림동화가 떠올랐다. 그책에서도 저렇게 표독스럽고 약간 성질있게 생긴 얼룩무늬 고양이가 나온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백만번이나 환생을 했다 하니, 어쩌면 이친구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백만번 산 고양이 - 시노 요코

100만 년 동안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100만 번이나 죽고서도, 100만 번이나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정말 멋진 호랑이 같은 얼룩 고양이였습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단 한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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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7. 2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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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전까진 과연 그 고등어 캐밥이란 것이 먹을 수는 있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캐밥(Kebab) 이란 걸 '구운 고기 요리'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접시 위에 담겨있는 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구운 생선을 빵에 싸서 먹는다니! 여행중에 만난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에크멕(Ekmek; 터키 바게트빵)에 고등어 구이와 채 썬 양파를 넣어 먹는다기에, 그 음식은 상상만으로는 전혀 맛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빵에 생선이란 매치가 쉽지 않은 느낌이었죠. 붕어빵 안엔 붕어가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겁니다.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카라괴이Karaköy 지역의 갈라타Galata 다리 주변을 거닐다보니 철판 위에서 이글거리는 고등어들을 여기저기서 보게 됐습니다. 꼭 단체로 헤엄치던 고등어떼를 넓다란 쥐잡이 찍찍이판으로 붙여 잡아놓은 것 같더군요. 처음엔 음식에 대한 낯설음과 사람들 무리를 헤집고 철판에 접근해야 하는 생경함 때문에 지나치기 일수였죠.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길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음식을, 또 사람들이 맛집이라 부르는 곳을 일부러 찾지 않고도 만나지는 고등어캐밥을 냄새만 맡고 지나칠 수는 없었죠. 그리고 한밤중에 갈라타 다리 위를 걷던 중 강변에서 흔들거리는 고등어캐밥 보트의 불빛을 봤을 땐, 여기 와보라는 듯한 그 손짓에 불나방처럼 끌려들어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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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타 다리 위에서 바라본 카라괴이 지역. 왼편 작은 보트 세 척이 모두 고등어캐밥 보트.


3 터키리라짜리 고등어캐밥을 처음 먹어본 순간, 그곳에 머물던 3일 내내 하루 몇개씩이라도 먹게 될 거란 것을 직감했습니다. 남은 돈을 잘 쪼개어 고등어 캐밥을 한 개라도 더 먹으려고 했고, 심지어 마지막 날 비행기 타러 가는 길에 배낭을 맨 채로 들러서 최후의 하날 더 먹었죠. 추운 날씨에 다니다보니 화장실에 자주 필요했는데, 1 터키리라 미만인 공중화장실 사용료가 아까워 요의를 참아가면서까지 고등어캐밥을 먹었습니다. 결국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걸 만들어먹겠다는 생각에 제 팔뚝길이만한 에크멕 하나를 사서 배낭에 통째로 넣고 들어오기도 할만큼 저는 그맛에 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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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캐밥 보트 앞은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보트를 선착장에 바투 대고서 그 앞에 천막을 치고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을 수 있는 앉은뱅이 의자와 작은 탁자를 사이사이 배치해놓고 장사를 하죠. 그리고 그 천막 앞에선 삐끼 한명이 행인들을 붙잡습니다. 저도 여러차례 삐끼질을 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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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로 다가가보면 한 사람이 선착장 위에서 주문을 받으며 계산을 하고 보트 안으로부터 고등어캐밥을 넘겨받아 손님에게 줍니다. 몇개씩 봉투에 싸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천막 아래 쪼그리고 앉아 먹는데, 흡사 우리가 길가다가 포장마차에 들러 떡볶이나 오댕을 먹는 것과 흡사한 분위기죠. 고등어캐밥을 먹는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탁자 위에 고등어캐밥을 올려놓고서 어린이처럼 양파를 덜어내는 사람들도 있고, 고등어의 뼈를 발라내거나 살을 갈기갈지 찢어 에크멕 안에 재배치 한 후 먹는 사람도 있죠. 비치된 소금이나 레몬즙은 취향에 따라 뿌려먹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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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의 한강에 배를 띄워서 마치 갈라타다리 아래에서 그렇게 하듯 고등어 캐밥 장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동안의 붕어빵에 대한 상식을 깨는 일이 될 겁니다. 누군가 돈벌이에 능한 분이라면 제 아이디어로 한강 위에 보트를 띄워 장사해도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망하더라도 절 원망하진 마세요. 저는 꼭 단골이 되어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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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7. 2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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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쉴 자미 (Yeşil Cami)

무슬림들의 예배당인 자미(Cami)는 그 규모가 클 수록 관광객들이 많이 찾기도 하겠지만, 규모가 작을 수록 왠지 모를 부담감에 안을 열어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관광지로써보다 더 제 기능에 충실하기 때문이겠죠. 부르사를 대표하는 울루 Ulu 자미와 인접해 있으면서 그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의 예쉴 Yeşil 자미를 찾았을 땐 기도가 한창 진행중이었기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미 앞 정원에 유난히 고양이들이 많아 슬금슬금 다가가보기도 하고, 눈치채고 도망가면 쫓아다니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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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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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외면

곧 기도가 끝났는지 자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문 밖에서 서로들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다가 그 앞에서 배급해준 간단한 음식물을 먹기 시작하더군요. 얼쩡거리면 제게도 기회가 올까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고요, 하지만 고양이들은 계속 배급의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어요. 그냥 괜히 정원에서 서성였던 게 아니라 그들도 예쉴 자미 앞에선 잔뼈가 굵은 고양이들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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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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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6. 1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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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의 이스티크랄 Istiklal 거리.
탁심 Taksim 광장을 향해 트램을 따라 걷던 저 길은, 서울의 명동 거리처럼 샵들이 번화하게 들어서있습니다.
그런 샵들 중 한 청바지샵의 쇼윈도 안쪽에서 발견한 고양이 한마리.

트램도 피하고, 사람도 피하고, 비도 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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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도시 쿠샤다스 Kuşadası 에서 꿈꾸는 고양이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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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5. 1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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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한 밤, 끝내 예니카프 Yenikapı 선착장을 찾긴 했지만 부르사 Bursa 행 마지막 고속선을 놓치고 말았다.

공항과 연결된 악사라이 Aksaray 지하철(Metro)역은 악사라이 트램(Tram)역과 이름만 같을 뿐 기대했던 환승구간 따윈 없었다. 어둠과 낯설음 속에서 찾아간 악사라이 트램역에서 예니카프 전철(Train)역까지의 길은 그보다 더 어려웠다. 위에서만 바라보며 그려진 지도는 그 길이 찾기 쉬운 대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적당한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면 될꺼라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실제 그 대로에는 고가차도와 지하차도가 막고 있어 길 하나 건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예니카프 선착장은 예니카프 전철역에서 눈에 보이는 정도의 거리였는데......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이드북에 써있던 부루사 행 IDO 쾌속선의 잘못된 막차 시각이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갔던 것조차 소용없는 짓으로 만들고말았다.

터키의 첫날밤을 부루사에서 보내려던 무리한 계획을 세웠던 나는 어딘가 주저앉고 싶은 피로를 느끼며 지금까지 헤맨 것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해서라도 잘 곳을 찾아야 한다는 각오를 해야했다. 여행은 여행이 아닌 것으로 바꼈다, 그것이 잠시뿐이길 바라면서.

다음날 해뜨기전 새벽, 잠시 쉬게 했던 몸을 일으켜 숙소에서 가까운 잔쿠르타란 Cankurtaran 전철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예니카프 선착장으로 향하는 첫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전날 놓친 부루사행 계획을 최대한 가깝게 쫓아가기 위함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잔쿠르타란. 곧 해가 뜰 것처럼 바다 넘어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고. 마치 일출인냥, 첫 전차가 이스탄불의 아침을 깨운다.

...여행이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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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5. 15. 00:57
세비야 알카자르의 정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미로와도 같은 정원에 숨어들어갔다가, 그늘 아래서 한참을 앉아있었나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가 내게 다가왔던가, 혹은 그를 보지 못한 내가 다가갔던 걸까. 한참을 앉아있던 곳의 바로 왼편에는 고양이 한마리가 누워 잠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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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보듬고 등을 쓸어주고 배를 간지렀다. 그런데 고양이는 잠든 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러웠던 내가 무안해져서, 조금 약이 올라 끌어다 안아버릴까 하던 찰나였다.

"이거 혹시 죽었나!"

흠짓 놀라 잠시 숨죽이고 지켜봤지만 다행히 그의 옆으로 누운 도톰한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나보다 더 그곳을 즐기고 있는 그를 방해할 생각을 버리고, 아까처럼 다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귀찮게 구는 날 바라봐주지조차 않는 고양이를 몇 번 더 어루만져줬다, 조심스럽게. 문득 그 엄청나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 속에 내가 혼자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혼자 있다는 것, 참 잘못된 거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만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Posted by Lyle
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5. 11. 15:21

에페스(Epes, Ephesus) 유적지를 나와 셀축(Selçuk) 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편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한국 관광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절버스에 올라타던 중이었죠.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원형극장에 둘러 앉아 장기자랑을 해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으니까요. 그 버스 앞유리에 교회 이름이 적혀있는 걸로 봐서는 단체로 성지순례를 왔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죠.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혹시 버스가 셀축으로 가면 얻어탈 수 있겠냐고 물어봤지요.

보통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흔히 집단 이외의 소속원들에 대한 목적 없는 거부감 같은 걸 갖고들 합니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접근도 해보지 않았겠지만 설마 성지순례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그런 여유조차 없을까 싶었지요. 그냥 버스 좀 얻어타자고 물어보는데 별 걸 다 따지고있다 싶기도 한데, 그래서 사실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저와 동행하던 친구가 먼저 가서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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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축 인근 지도


{하루 여정} 저는 이른 아침에 셀축의 오토가르에서 미니버스를 타고서 서쪽으로 40분 거리에 있는 해변 도시 쿠샤다스(Kuşadası)에 먼저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셀축으로 돌아가는 미니버스를 타고 돌아가던 중 에페스에 내렸던 거지요. 사실 에페스에서 셀축으로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도 갈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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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스의 히치(Hitch) 소녀

만큼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일정을 그리 잡았던 겁니다. 셀축에서 가깝다 하여 에페스를 먼저 갔다면, 에페스에서 쿠샤다스로 가기 위한 차편이 셀축에서보다 애매해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제로 해보니 구간을 오가는 미니버스는 정류장도 없는 곳에서 잠깐씩 정차할 뿐이어서 현지사람이 아니고서는 에페스에서 미니버스를 잡아 타는 게 쉽지는 않겠더군요. (버스에서 내릴 때 역시 같은 이유로 난감해지긴 하지만 다행히 버스기사가 눈치껏 내려줍니다. 관광객 처럼 보이는 동양인이 내릴 곳이라고는 종점, 기점 그리고 그 사이의 에페스 뿐이니까요.) 게다가 셀축과 쿠샤다스를 오가는 미니버스는 해가 꺼질 무렵에 운행을 중단하기 때문에 에페스를 먼저 들렀다가 쿠샤다스를 간다면 돌아오는 차편이 위험해질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에페스에서는 폐장 시간이 문제일 뿐 돌아오는 건 걸어서도 갈 수 있으니까 부담이 덜하죠.

에페스 유적지의 북쪽 입구는 셀축의 오토가르(버스터미널)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이들은 산책삼아 에페스까지 걸어가기도 한다죠. 실제로 에페스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했던 친구는 셀축에서 그곳까지 걸어왔다고 합니다. 걷던 중간에 히치하이킹을 해서 차를 얻어타긴 했다는데, 특이하게도 경찰차를 잡아 탔다더군요. 성지순례단 버스 얻어 탈 때도 알아봤지만, 히치(hitch) 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히치 소녀와 함께 버스를 타고서 셀축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셀축과 에페스 유적지 사이길 옆에는 또다른 유적지 하나가 있는데 그곳을 지날 무렵 인솔자가 마이크를 꺼내 들더군요.

"여러분들 왼쪽에 보이는 곳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터 입니다."

이쁘장한 여자애한테 승차를 허락해준 건데 덤으로 저까지 따라 탄 게 불만인 듯 해보였는데, 거기다 귀동냥까지 하고 있으니 밉상으로 보여질까봐 안 듣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 듣긴 다 들었죠.

"지금은 다 부서지고 터만 남았는데, 방금 전에 여러분들이 나오신 에페스에서 보셨던 것들 중 일부는 이곳에 있던 것들을 옮겨다 놓은 것들이기도 해요. 자, 이렇게 여러분들은 오늘 세 곳을 보신 겁니다. 처음에 들르셨던 게 성모마리아의 집이었고요, 에페스를 거쳐서 이렇게 들르진 않았지만 아르테미스 신전까지......"

이들은 아마 대절한 버스를 타고, 저는 차편이 마땅치 않아 갈 수 없었던 성모마리아의 집에 갔다가 에페스 유적지의 고지대인 남쪽 입구에 내려줬나봅니다. 그리고서 셀축에서 가까운 북쪽 입구에서 관광을 마친 그들을 픽업한 거겠죠. 몇년 전 어머니께서 터키와 그리스에 성지순례를 가셨을 때 이들처럼 이렇게 다니셨겠구나 싶어졌죠. 성모마리아의 집은 신자가 아닌 저에게 그다지 흥미꺼리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어머니의 그곳에 대한 인상적인 말씀이 떠올라 가보고 싶기도 했죠. 하지만 굽이굽이 산길을 꽤 올라가야 하고 시간도 모자랐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이틀 여정} 사실 시간만 많다면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어요. 에페스와 쿠샤다스를 하루에 다 보기 위해 위에 제가 설명한 것처럼 일정을 고민할 필요도 없겠죠. 만약 셀축에서 하루 여행을 한다면 저처럼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이틀 여행을 한다면 마리아의 집까지 가는 차편을 알아보고 그곳을 구경한 후에 에페스의 남문 또는 북문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마리아의 집에서 성지순례단을 만나기 십상일테니 에페스까지 가는 데 차를 얻어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루는 에페스 근방을 여행하고, 또 하루는 쿠샤다스에 가는 거죠. 날씨만 좋다면 쿠샤다스는 꼭 가볼만한 곳입니다. 오전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한 후 늦은 오후에 셀축으로 돌아와 에페스 방물관을 관람하면 충분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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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cal Mystery Tour/Turkey2008. 2. 17. 01:18

사실은 널 기다린 거야.

숙소에서 나와 아타튀르크 자데시(Caddesi;도로) 쪽으로 걸어내려갈 때었어. 맞은편 보도에서 발견한 너의 작은 손엔 차이(Çay) 쟁반이 들려있었지. 흔들거리게 되어있는 쟁반 위에 차가 쏟아지지 않는 걸 보면 넌 아마 꽤 오래 차 배달을 다녔던가봐, 그 어린 나이에도 말이지.

그런 네가 예뻐보여서 난 널 다시 보고 싶었어.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네가 지나간 맞은편으로 건너가 밴치에 앉았지. 네가 차 배달을 마치면 이 길로 다시 돌아올 것 같아 기다렸단다. 저 앞에 아타튀르크 자데시에서 이 길로 꺽어지는 좁은 보도의 모퉁이를 네가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넌 정말 내가 상상했던 모습으로 나타났지. 밴치에 앉은 내가 마침 너와 눈 맞추기 좋은 높이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혹시,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올 날이 있다면, 여기 다시 앉아있을께. 그때는 서서 널 맞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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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