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y in the Life2010. 9. 20. 19:24



배터리를 갈아주면 된다는 건 머리로만 아는 일이었죠.

그래서 오래 멈춰있던 시계였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멈췄던 시간도 다시 갑니다.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9. 16. 01:33
몰랐겠지만 난 그때 널 끌어안고 싶어졌어. 결승점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런 생각하면서 달리고 있었단다. 나에게 감격스러웠던 건 연습 때도 그렇게 느리게 뛰어본 적 없었던 10km 를 완주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처음으로 누군가와 동반해서 완주했기 때문도 아닌, 출발선에 서서 불쑥 들이밀었던 두가지 약속을 결국 네가 지켰기 때문이었지.

첫째, 아무리 힘들어도 뛰는 도중에 걷지 않기.
둘째, 나에게 널 두고 먼저 가라고 말하지 않기.

막상 출발선에 섰을 때는 네가 이 두가지가 어떤 의미인 건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것 같았어. 나를 먼저 보내므로써 부담을 덜 수 있는 기회도, 그렇다고 편해지고 싶은 유혹 조차도 너에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이 두가지 약속에 대한 무게는 그렇게 가볍게 시작됐지만, 힘겹게 뛰고 있는 널 보는 것만큼 점점 더 무거워지더니 골인 지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는 나에게 정말 커다란 기쁨을 안겨줬단다.

이제 또다시 너와의 달리기를 준비하면서 나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됐단다. 이번엔 너에게 약속 같은 걸 해달라고 하지 않을 꺼야. 그리고 그때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너와 다시 시작하는 마라톤에 또 한 번 의미를 갖어보려고 해. 그게 뭔지 지금부터 말해줄께.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9. 8. 22:49

나에게는 이질적인 여자들에게 호감을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

잠깐이라도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욕을 참 잘해서 관심을 갖었던 사람과,

놀라울 정도로 어눌한 말투가 좋았던 사람도 있었고,

시간 날 때마다 나이트에 놀러다니는 성질이어서 도무지 함께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탕녀도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 다들 매력적인 여자들이었다.


이제 경험보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고,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이 좋아졌다.

그런데 어느새 그런 내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참 이질적인 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로인해 알게 됐다, 내가 그 여자들에게 갖었던 느낌은 호기심이었다는 걸.

그들에게 내가 상처를 남기진 않았을런지...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9. 8. 13:54
아버지의 세번째 차는 소나타II 였다. 앞서 타셨던 포니II와 스텔라는 중고로 사셨으니 새차를 사신 건 이게 처음이셨다. 네번째 차를 사실 때 2년이나 고민하시던 걸 생각하면 94년에 소나타II를 새차로 구입하실 땐 아마 훨씬 더 그러셨을 꺼다. 아버지께선 내가 운전면허를 딴 2005년까지 그 차를 11년을 타시고서 나에게 물려주셨고, 그렇게 아버지의 첫 새차는 나의 첫 차가 됐다. 그 차에는 세월만큼보다도 더 아버지가 많이 묻어있었다.

중고자동차 매매 광고를 보면 값 좀 나가는 물건들에 붙은 뻔한 호객용 거짓말들이 있는데, 그것들중 하나는 이런 거다. "대학교수님께서 출퇴근 때만 이용하셨던 차로 상태는 신차급입니다." 대학 교수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를 깨끗하게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버지 때문에 약간 수긍이 가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차는 오래 됐음에도 정말로 출퇴근 하실 때만 탔셨기 때문에 1년에 고작 1만km 꼴로만 운행됐다. 게다가 워낙 천천히 운전하셨는지라 차 상태는 무척 좋았다. 그러나 물려받은 직후부터 서툰 운전실력과 급한 성격 때문에 차는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건 자동차였지 운전 성향은 아니었나보다. 그동안 억눌릴 수밖에 없었던 이 차의 질주본능을 깨워주곤 했었으니까.

이 차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94년 한밤중에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를 처음 태웠다. 속내를 잘 드러내시지 않는 아버지시기에 그때는 몰랐는데, 당신의 첫 새차를 몰고 아들을 태우러 학교 앞으로 오시는 길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셨을 걸 이젠 알겠다. 아마도 소나타II 이후로 내가 산 내 차로 처음 부모님을 모셨을 때의 폼나는 느낌과 비슷했을 꺼다. 그리고 그이후로 아버지께서 재직하셨던 대학에 입학하고 또 졸업하기까지 소나타II는 부자간에 드물었던 둘만의 공간이 되어줬다. 늘상 학교 일로 바쁘셨던 아버지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내가 아버지보다 더 늦게 집에 들어오곤 했기 때문에 자율학습 후 귀가길에 태워주시곤 했어도 기억날만한 대화 한 조각이 드물 정도였다. 그렇기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아버지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등하교하는 일이 서먹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난 그걸 꽤 즐겼고 아버지도 그러셨던 눈치셨다. 아마도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이유였던 것 같다. 결국에 그 등하교 길은 내가 당신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줬고, 이 차는 그 시간의 공간적 배경이 되어줬던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차에는 세월보다 더 깊은 흔적이 묻어있다.

명절 때 아버지와 단둘이서 당신의 고향에 성묘차 오가던 길도 빼놓을 수 없는 흔적들 중 하나다. 나를 조수석에 태우시고서 십수년을 운전하셨던 그길에서 나는 대체로 잠들어있었는데, 아버지께선 여관비를 달라는 똑같은 농담을 꾸준히 반복하셨다. 언젠가 내가 운전을 시작하면 당신과 나의 좌석이 바뀌게 될꺼란 걸 예상했었지만, 막상 면허를 딴 후에도 아버지께선 나에게 운전석을 쉽게 내주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명절 연휴에 당신의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운전을 맡기셨다. 그리고 조수석에 옮겨 앉으신 아버지의 침묵이 길어졌을 때 문득 알게 됐다. 아버진 어느새 잠들어계셨다. 조수석에서 단골로 잠들곤했던 나와 내가 운전할 때 내 옆에서 잠드신 아버지의 교차된 모습은, 아직 운전면허가 없었을 때 막연했던 '언젠가는 내가 모시고 다니게 될 꺼다' 라는 예상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느낌이었다. 언제나 운전석에만 앉아계셨던 당신께서 차 안에서 잠드신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피곤하셨을 꺼다. 깨셨을 때 여관비 내시라고 말씀드리면 웃으실런지 속으로 생각했었다. 차마 말하진 못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 머물게 된지 10년이 넘었다. 교통 체증과 주차비 부담으로 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막상 면허를 따고 아버지로부터 차를 물려받은 후에도 운전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쉬울 때 유용한 도구가 되준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마트에 다녀올 때 생수를 두어개씩 사들고서 손에 비닐 배긴 자국을 남겨야 했는데, 운전을 하게 된 후부터는 두 달 먹을 생수를 한 꺼번에 나를 수 있게 됐다. 직장생활에 이력이 붙으면서 점점 돈보다 시간이 비싸지게 됐고, 그 때도 이 차는 대중교통에 시간을 맞출 필요 없이 내 시간을 좀 더 편리하게 계획할 수 있게 도와줬다. 이 차를 타고 몇 번 놀러다닌 기억들도 있고, 한 번은 사고를 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나의 소나타II는 급속히 노쇠했는데, 결국 그 차를 5년 타고서 나는 다른 차를 장만하게 됐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듯 나의 두번째 차도 중고 자동차지만 93년식 소나타II에 비하면 낯선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자동차다. 일단 차 열쇠부터 희한하게 생겼고, 사이드 브레이크도 자동이고, 시트에서 바람도 나온다. 그런데 소나타II와 두 세대쯤은 차이가 날 것 같은 차를 장만하고도 소나타II를 한참동안 처분하지 못했다. 그 이유들 중에는 앞에 적은 기억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 나의 그리고 아버지의 소나타II를 폐차했다. 폐차장에 차를 넘겨주기 전에 실내와 트렁크의 짐들을 비웠는데, 그중엔 아버지께서 넣어두셨던 물건들을 나역시도 치우지 않았던 것들이 꽤 많았다. 어딘지도 알 수 없고 기간도 한참 지난 세차권이나, 도로가 다 바뀌어서 쓸 수 없게 됐을 지도책 따위들은 어차피 버릴 것들이니 차와 함께 보내려했지만 결국 전부 다 꺼내 담게 됐다. 그렇게 물건들을 모두 비웠는데도 차 키를 넘겨주긴 쉽지 않았다. 텅빈 실내를 바라보니 아직 뭔가 가득히 들어 차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물건처럼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차는 떠나보냈고, 이렇게 그 흔적들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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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2010. 7. 7. 07:57
사직공원 옆 어느 골목에 서있었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내 주변에서 우왕좌왕 고개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보니 이름 모를 잠자리를 쫓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계절에 왠 잠자린가 싶지만 잠자리는 맞다, 이름은 몰라도.) 그것들이 나랑 더 가까워졌을 때 헛발질로 둘을 갈라놨다. 눈앞에서 벌어질 끔직한 광경을 보고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잠자리로써는 내게 박씨를 물어다 주거나 종을 머리로 들이받을만한 일이다. 잠자리에게 각골할 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풀을 묶어 은혜를 갚는다고 이야기할머니들이 그러셨다. 혹 나 없어진 틈을 타 이름 모를 것들의 추격전이 마무리 됐다면 전혀 기대할 일도 못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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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7. 1. 01:12
하하는 국궁을(전통 활쏘기) 배우는 베트남 여자아이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국궁교실 명부를 보면 원래 이름은 '레 프엉 하' 인데 제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람들이 이미 '하하'라고 부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왜 '하하' 라고 불리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국궁장에는 외국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국궁을 수련하고 즐기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호기심에 체험하러 오는 관광객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가 있죠. 그런데 그들을 대하는 저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이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푸는 배려나 친절을 경계합니다. 거기엔 가식과 모순이 서려있기 때문이죠.

원래 우리는 이방인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로 옛날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며, 시골인심 좋다고 말로만 전해지는 지방에선 실제 그런지 모르지만 서울은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웃음보다는 찡그림으로 외면하곤 하는 사람들이 서양 외국인들에게는 무척 친절한 편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마치 가면을 쓴 듯한 미소를 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해외에 여행나가서 외국인 입장이 되어 경험했던 친절을 가식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해외 여행지에서 항상 친절만을 경험했던 것도 아닙니다. 아마 관광버스 속이나 여행자 그룹 안에 갇힌 채 정해진 경로를 따라 타인과 섞임 없이 여행한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멸시, 모욕, 차별 같은 것도 제 여행 속엔 분명 있었죠.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볼 게 아니라 그 이면까지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겁니다. 한단계 더 나가서 우리가 배푸는 친절은 기실 특정 부류에 한정적이고, 그외 자격미달의(?) 외국인들에게는 멸시나 차별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어떤 유대감도 없는 타인일 뿐인 외국인들에게 친한척 행동하는 걸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모순됨 때문이기도 합니다.

국궁장에서는 모두가 하하에게 친절합니다. 그녀는 대학생이고, 우리말도 꽤 잘 하고, 물가가 비싼 서울에서 유학하는 걸 보면 형편 좋은 집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짐작이 됩니다. 물론 사람들이 그런 걸 계산하고서 행동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제가 조심스러워집니다. 이건 미안함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녀와 이야길 하다보면 우리가 평소 베트남 사람들에 대해 보고 듣고 말하던 것들을, 그녀 앞에서는 평소와 다르게 이야기하거나 아얘 이야기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니까요. 하하도 그걸 모를 것 같지 않습니다.  하하는 농촌에 시집온 베트남 여자들을 진료하는 자원봉사자들의 통역을 하고 있다 하니 아마 저보다 훨씬 더 한국에서의 베트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겠죠.

하하 송별회에서


지난 토요일 하하를 국궁장에 만났습니다. 지금쯤 그녀의 고향인 하노이에 돌아가있을테니, 그날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활 시위를 당기는 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활을 당기는 느낌은 어땠을까요. 제 옆에서 활을 당기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녀도 저도 활에 화살을 메겨서 과녁을 향해 쏠 실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세와 힘을 기르는 수련을 하고 있고, 순서대로 벽을 보고 선 채 빈 활을 반복해서 당기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 사대에 서서 과녁에 화살을 날리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녀에겐 벽거울에 비친 자신의 활개편 모습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던 지난 토요일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실은 그날 그녀가 쓴 20파운드짜리 활로는 140미터 과녁까지 화살이 날아가지도 않습니다. 그게 허무한 일이 되지 않는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요.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하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시간에 우리말을 꽤 능숙하게 말하고 읽는 그녀의 "한국 수련"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녀가 우리보다 더 우리를 진지하게 배우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외국인에게 무턱대고 배푸는 친절보다도 더 향기로운 뭔가를 느끼게 만듭니다.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6. 8. 01:14
지금까지 30년 넘게 살았는데, 그 중 제 힘으로 산 건 10년 정도밖에 안되고, 그전엔 부모님 덕을 보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을 벗어난 10년동안 꾸준히 앞으로 남은 생을 잘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겁나고 두려울 때가 왕왕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맞이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함께 하면 행복해질 사람을, 좀 더 솔직히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해줄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그들에게 비루한 현실을 멀게 느끼게 해주는 조건들일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혼자 버텨내기 어려운 삶에, 함께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속도와 소유를 행복으로 향한 길로 착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약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찾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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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2010. 4. 25. 17:40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 있다. 나는 그 소설의 내용보다 더 저 문장을 좋아한다. 실제로 10km 쯤 긴 터널을 빠져나온 순간에 눈 앞에 펼쳐졌다는 설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두운 밤이었기에 환하게 빛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상상하는 일은 질리지 않는 흥분을 가져다 준다.

밤이어서 유독 더 빛나보이는 것이 한가지 더 있는데, 이효석작가님은 그걸 메밀꽃이라 했지만 내게는 목련꽃이 그렇다. 고등학교 자율학습을 마치고 자정 무렵에 학교를 나서면 조명도 없이 깜깜한 학교의 텅빈 운동장에 유독 방글방글 빛나는 꽃이 있었는데 바로 목련이었다. 봄에 짧게 피어서 길게 만나보기 어려운 목련 꽃. 나를 마중나오셨던 어머니께 하루는 당신의 웃는 얼굴이 목련꽃을 닮았노라고 말씀드렸던 것에 당신은 오래오래 기뻐하시기도 했었다.

요즘 늦은 밤에 퇴근하면서 회사 건물을 나설 때마다 보게 되는 것이 벚꽃나무들이다. 매일 밤마다 지친 마음의 밑바닥까지 하얘지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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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2010. 3. 30. 20:11
수년 전에 교통사고 때문에 병원에 실려와 수술대 위에 누웠다.

정신이 혼미했을 때라 자세한 기억이 아닌 이미지로만 남아있는데,

그래서 아마 사실과는 다를 꺼다.


그 수술대는 스테인레스 같았는데 중학교 해부시간에 물고기를 올려놓던 쟁반처럼 차가웠다.

난 그 위에 축 늘어져서는 벌어진 나를 꾀매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뻐끔거렸다.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하얀 조명에 가려 알아볼 수 없는 도구들은 내 살에 닿아야 무엇인지 짐작이 됐다.


수술대 위에서 엄청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 같지만, 실제론 그리 길지 않았을 꺼다, 역시 아마도.

그렇게 길다고 느껴진 시간 동안에 나는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서웠던 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빨에 묶은 실을 예고없이 잡아당길 엄마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못하면서도 엄마에게 안기고 싶었을 때.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탈골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팔을 X-ray검사 때문에 억지로 이리 펴고 저리 벌리고 해야 했을 때.

그런 것들을 아무리 떠올려도 지금 이순간을 달래줄만큼 아프고 겁나는 경험이 내게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스테인레스 수술대 위에 누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

그 후로 지금보다도 더 괴로웠던 때는 있었다.

그래서 고통은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좋은 결과를 포기하더라도 이 고통을 짧게 끝내고 싶어지는 마음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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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2010. 3. 9. 10:52
사실은 계절이 아니라, 사람들이 계절을 지나치며 바삐가고 있습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봄을 향해 등돌린 사람들에게 겨울이 눈을 흩날려 배웅하고 있네요.

쌓이지도 않을 만큼은, 지저분한 안녕이 되지 않을 만큼.

눈은 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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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2. 16. 16:25
집에 손님이 오면 어두운 다락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 심정을 난 이해한다. 이상의 "날개"를 처음 읽었을 때 나와 같았던 사람이 또 있음에 그가 반가웠었다.

어렸을 때부터 명절에 손님이 찾아오면 나는 방에 갇혀서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이런 내가 딱해보이셨는지 어머니께서 여물 주듯 인삼물 같은 걸 방에 날라다 주시지만, 저걸 마시면 밖에 더 나가고 싶어지게 된다. 

"날개" 속 나의 탈출 욕망은 오줌이 마려운 데 참아야 하는 것과 같다는 걸 난 안다. 이렇게 서른이 넘어서도 방에 갇혀있는 이 어른 아이의 날개는 바로 아이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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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10. 2. 10. 13:44
저는 지금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와있습니다. "보광 휘닉스파크"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더 잘 알아듣는 곳이기도 하죠.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부르길 싫어하네요.

저는 스키를 탈 줄 모릅니다. 여기도 사실 학회 때문에 왔고요. 아침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는데 서울에서부터 줄곳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평창엘 들어서자마자 함박눈으로 바뀌더군요. 이제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데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수도 할 수 있는 곳에서 물만 먹고 가기 때문인 것 같진 않고요.

차에 기름이 떨어져서 가길에 정차해두고 주변에 주유소를 검색하려고 해요. 주유소까지 갈 연료를 아끼려고 시동을 꺼놓고 있었더니 금새 차 위에 눈이 쌓이네요. 아마 지금 올해의 마지막 눈을 맞고 있는 거겠지요. 이렇게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주변 주유소를 검색하듯 저는 서울 날씨도 알아낼 수 있지만, 검색과 어울리지 않는 궁금함도 있습니다. 서울에도 눈이 내리고 있나요?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점심식사를 하러 가더군요. 그중에 봉평 메밀국수를 먹으러 간다는 사람들은 어저께 송어회를 먹었답니다. 이곳의 송어회는 제게 추억의 음식이기도 하죠. 하지만 눈이 많이 와서 돌아갈 길이 막막하면서도 느껴지는 이 아쉬움은, 제가 그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서먹함 때문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유 없이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보려고요. 이제 차 유리창이 눈에 가려서 밖이 보이지도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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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2010. 1. 10. 14:15
제가 사는 곳은 반지하입니다. 밤새 폭설이 내렸던 일주일 전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눈 쌓이는 모습을 그렇게 낮게 바라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눈밭에 눈 가루가 떨어지는 걸 옆에서 바라보는 건 고양이나 개들 처럼 네 발로 낮게 다니는 짐승들이나 보는 모습일 겁니다. 그걸 보고있자니 이 마을에 사는 길고양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눈을 피하고 있을까 싶어지더군요. 자동차 아래서 저 처럼 눈 쌓이는 걸 아래서 지켜보다가 차까지 덮어버린 눈 속에 갖힌 고양이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반지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에서 고양이 오줌 냄새가 심하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음침한 계단 아래에 사는 고양이의 소행이 분명했어요. 간혹 퇴근해서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들어섰을 때 지층에서 저랑 눈이 마주친 뒤에 계단 아래로 숨어들어가는 고양이를 몇 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B102호가 원망 스러워졌죠.

B102호가 원망스러웠던 이유는 그 고양이와 B102호의 친분관계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사는 고양이 탈리랑 방에서 함께 놀고 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밖에서 어떤 기척을 느꼈는지 탈리가 귀를 쫑긋 새우더니 현관 밖을 응시하더군요. 녀석에게 투시력이 있을리는 없겠지만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뭔가가 밖에서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어요. 저는 탈리 같은 능력이 없어서 그걸 눈으로 확인해야 했고, 현관으로 다가가서 도어경을 통해 밖을 살폈죠. 곧 B102호의 문이 열리면서 밖으로 나간 고양이를 찾는 B102호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렇게 밖에서 고양이를 찾아 안고서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아마 B102호도 고양이를 키우는데 집에 사람이 없을 땐 고양이를 밖에 내놓는가봅니다. 그러니 지하에서 진동하는 고양이 오줌 냄새에 대한 뒷처리 책임은 B102호게 있다고 할 수밖에요.

어제 한밤중에 밖에 볼일이 있어서 집을 나섰습니다. 냄새가 진동한 이후로 지하 계단 아래를 응시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가끔씩 제가 지나갈 때 그안에서 몸을 숨길려고 무언가 휙 지나가는 걸 보기도 했었죠. 어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진 않았습니다. 대신 밖에서 볼일을 보고 건물 현관을 다시 들어서는데, 계단 아래에서 무언가 쏜살같이 위로 튀어오르더니 제 옆에 닫겨진 현관문에 꽈당 부디치더군요. 정말 순식간이었는데 고양이가 지하에 살고 있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훨씬 더 놀랐을 겁니다. 제가 사는 건물 현관은 대부분의 빌라들처럼 두 개의 유리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는데, 저는 오른쪽 문만 열고 들어서고 있었고 저를 피해 밖으로 나가려던 고양이는 제 왼쪽 문으로 나가려다가 부디친 거겠죠. 열려있지도 않은 문에 들이댄 건 유리문인데다 밖이 어두웠기 때문일 겁니다. 녀석은 충격에서 회복되지도 않았을텐데도 곧바로 오른쪽 현관문에 서있던 제 다리 옆을 비집고 나가버렸습니다.

지하에 냄새를 피운 녀석에 대한 미움 탓이었는지 현관문을 닫아놓으려고 했어요. 밖으로 나가버린 녀석을 바라봤는데, 문 밖에 3미터 정도 떨어져서 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다시 못 들어오게 해야겠다 싶어 문을 닫으려던 제 팔이 머뭇거렸습니다. 그렇게 쏜살같이 절 피해서 도망나간 고양이가 멀리 가버리지도 않고, 제가 집으로 들어가버리고나면 다시 들어올 것처럼 차가운 눈밭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 고양이는 조명을 등지고 서있어서 모습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보였던 건 가가멜의 고양이 아즈라엘처럼 오른쪽 귀에 동전만한 구멍이 있는 거였죠. 도로에 쌓인 눈이 그 구멍 사이로 녀석의 검은 실루엣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B102호가 안고 들어가던 하얀 고양이도 아니었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가끔 눈마주쳤던 갈색 고양이도 아니었어요. 어두운 색에 몸이 퉁퉁한 처음보는 그냥 길고양이 였습니다. 아마 제가 문을 닫아버리면 어디론가 가서 이 추운 밤을 보내게 될 겁니다. 다른 빌라를 찾아 기어들어갈지도 모르죠. 혹시 새로 찾아들어간 곳을 이미 차지한 고양이가 있다면 영역다툼 끝에 나머지 한쪽 귀에도 구멍이 날 수도 있겠죠. 그러니 이 추운 겨울날 지하에 고양이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건 제가 사는 곳만이 아닐 겁니다. B102호를 원망할 일도 아니고 추위를 피해 드나드는 길고양이들을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저를 마중나온 탈리가 귀를 곤두새우고서 제가 들어선 현관 밖을 한참동안 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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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ay in the Life2009. 12. 24. 13:41
중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당시의 저는 꽤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죠. 지금처럼 논리나 근거를 찾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도 서툴렀고 단지 삐뚤어진 시각으로 그때그때 반응하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하루는 담임 선생님께 보충수업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죠. 매월 학생들한테서 수업료를 추가로 걷어서 이뤄지는 보충수업인데 체육대회 같은 일에 시간표가 겹치거나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보충수업이 이뤄지지 않는 날들에 대한 질문 같은 거였습니다. 아니, 사실은 질문 정도가 아니라 '부정부패', '비리' 같은 말들을 그 뜻도 모르면서 섞어썼던 것 같네요.

제게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히기도 했던 일은 제 담임선생님도 학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그 문제에 공감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그자리에서 채벌을 받고 말았을테죠. 그래서 그때는 제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시는 선생님이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죠. 왜냐면 선생님께선 교무회의 때 그 문제를 목소리 높혀 이야기하셨나봅니다. 그러면서 학생 하나한테서 그런 지적을 받는 일까지 생겨서야 되겠냐는 논조의 이야길 하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저는 교감 선생님께 불려가게 되고 나중에는 교장실에 혼자서 불려가게 되어서 결국 다행이라 여겼던 일이 커져버리는 바람에 그렇지 않은 일이 되버린 거죠.

교감선생님을 찾아가던 날 교감선생님의 교무탁자까지 가는 길을 꽤 멀었습니다. 마치 오락게임에서 끝왕을 쳐부수기 위해 그 앞에서 상대해야 하는 악의무리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죠. 일단 담임선생님 책상 앞에서 어떤 문제로 오게 됐다는 말씀을 들어야 했고, 교감선생님을 향해 걸어가던 중 술취한 기술선생님께(한낮에 술에 취해계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붙잡혀서 따귀를 맞았습니다. 교무실에 들어서기 전까진 교무실로 불려온 영문도 모르던 제겐 참 당황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감선생님 앞까지 간 저를 물끄러미 보시던 교감선생님은 별 말씀 안하시고 저를 데리고 교장실로 가시더군요.

교장실 쇼파에 교장선생님과 단 둘이 마주보고 앉게 됐습니다. 보충수업료에 관한 문제로 선생님께 문제삼은 학생이 있다더니 어떤 학생인지 보고 싶어서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이시라는데, 저는 제 의지도 아닌 그 분을 뵙는 일로 따귀까지 맞게 된 거죠. 사실 그때 저는 그냥 삐뚤어져있다가 선생님께 대들 꺼리로 보충수업 이야길 했을 뿐 뭔가 논리를 가지고 더 이야기할만한 꺼리를 갖고 있지도 않은 채로 일이 커진 것에 곤란해졌습니다. 저를 대변하겠답시고 겨우 만들어서 한다는 말이, 점심시간에 도시락 못 싸고오 라면 사먹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학생들로부터 보충수업료를 똑같이 거둬들이고서 보충수업을 안하는 날들이 가끔 있는 것 같아서 궁금했다는 거였죠.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 제게 이렇게 여쭤보시더군요.

"보충수업이 국영수 위주로 이뤄지기 때문에 체육선생님이나 그밖에 다른 과목 선생님들께는 수업료가 얼마 돌아가지 않는데, 만약 그렇게 남은 보충수업료를 체육대회 치르시느라 고생하신 체육선생님께 수고하셨다는 징표로 드렸다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할 말이 별로 없는데, 그런 질문을 받으니 대답하기 무척 어려워지더군요. 그런데 순간 그게 유도질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저는 보충수업료가 새나가고 있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 제가 "아, 그렇게 좋게 사용되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라고 바꿔말할 수는 없습니다. 혹은 그 반대로 보충수업을 하지도 않은 체육선생님께 수업료를 드린 것도 잘못됐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선생님의 수고를 모르는 나쁜 학생이 될 수도 있겠죠.

결국 엉겁결에 대답을 했더니 교장선생님께선 "알았다. 나가보거라." 하시더군요. 얼빠진 채 교장실을 나왔더니 복도에서 담임 선생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쭤보시더군요. 순진하게도 전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안스럽게 보시고 위로하러 와 계신다고 당시엔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혹시 당신께서 저를 소재삼아 교무회의 때 문제를 제기하셨듯, 저도 교장선생님께 담임 선생님 핑계를 댔을까 싶어서 오셨던 건지도 모릅니다. 중2 보다 그때의 선생님 나이에 가까워지다보니 옛날 일들이 그때와 다르게 다시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교장선생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저는 보충수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물어본 적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런 아이들을 대표해서 여기 와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제 생각만 가지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그런 저를 보시더니 씨익 웃으시곤 저를 대리고 교실로 가셨습니다. 교실이 그렇게 편하고 안심이 되는 공간인 줄 처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제 자리로 돌아와서 제가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잘 기억이 안나네요. 그게 제가 처한 작은 사회 속 현실에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말이죠.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9. 12. 17. 21:46
매일 집에 늦게 들어와서 아침인사 하고 잘자 인사 하는 게 전부에요.

간만에 집에 일찍 들어와서는 바닦 여기저기를 기어다니는 등짝을 보고 있자니 측은해서 좀 쓰다듬다가 들어올려서 안아줬어요.

원래 이렇게 오래 안기지 않는데 그냥 가만히 있는군요.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한동안 이러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고양이를 안고서 한 손으로 타이핑 중이에요.

짝사랑이죠, 저만의.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9. 12. 11. 00:48
세계 평화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외세에 굴복한 파병에 대한 반대가 아닌 절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껴있는 나라에 가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9. 12. 10. 01:18
올해 중반쯤 월요일 되면 그 다음 날이 금요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이제는 아침이 되면 곧 밤이 되는 기분이다. 시간이 모자라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아는척 하고 싶은 주제로 세미나도 해야하고, 그동안 머릿 속으로만 구상해놓고 시간 나면 만들어야지 했던 프로그램들도 짜고 싶다. 게다가 내년 과제를 준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진도를 맞추기도 해야 하고, 기존에 하던 일들도 절대 놓을 수가 없다. 회사에서 이런 일들은 생각만 하고 있어도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붙어버리곤 한다.

일부 배신한(?) 사람들 때문에 한 번 미뤘던 연주회, 고맙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꼭 하고 싶어졌다. 책 번역도 시작 해야 하고,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잡지사 원고도 몇 일 후면 마감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할 꺼다. 내가 밥 관리를 잘 못한 덕에 멸치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고양이에게 사료도 사다줘야 하고, 주말 워크샵 때 와인을 종이컵에 마시는 짓을 하지 않고 보지 않으려면 동료들에게 나눠줄 프크닉용 와인잔도 미리 사두어야 한다. 

연말이 되고 날이 추워지니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방해만 할 게 뻔한 연애가 하고 싶어진다.

조금 전에 등을 켜고 아침이 됐는데 또 금새 불을 끌 시간이 됐다.
눈만 감았다 뜨면 다시 불을 켜게 될 텐데, 
도대체 하루는 어디에 있는 걸까.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9. 11. 4. 14:35
약간 쌀쌀했던 올림픽 공원의 2001년이었다. 음식을 취미이자 직업으로 여기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갔던 피크닉에는 낯선 사람들의 수 만큼 낯선 음식들도 많았다. 거기 온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기억하지도 못할 그 음식들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지만, 그저 '샐러드', '샌드위치', '파스타' 같이 그것들을 대표하는 평범함으로 부르기엔 아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재료가 낯익더라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거나, 처음 보는 재료들과 소스들이 단지 낯설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피크닉 음식이 그래도 되는 걸까 싶지만, 어차피 내 삶에는 피크닉은 커녕 김밥 싸들고 떠나는 소풍조차 없었다. 솔찍히 맛있다고 느껴지는 음식이라기 보단 그 생경함이 더 좋았다. 첫 인상에 반할 수는 없더라도 익숙해지면 즐기게 될 것 같은, 하지만 평범하지 않아서 익숙해지기 어렵고 그래서 더 즐기게 되는 그런 음식들. 루꼴라의 쌉싸름함 같았달까.

오로지 하나 기억하는 이름이 루꼴라였다. 그 음식들 중 가장 평범해보였던 BLT 샌드위치에 쌉싸름한 풍미가 준 즐길 수 있는 정도의 낯설음이 인상적이었다. BLT 가 무엇의 약자냐고 친구에게 물었었고, 그는 Bacon, Lettuce, Tomato 를 뜻하며 상추 대신 Rucola 를 넣었다고 했다. 그 모임이 있은 후에 다시 만난 그에게 애써 한가지 기억해뒀던 루꼴라가 좋았다고 아는 척을 했다. 약간 의도하기도 했었지만 그는 내가 기억해준 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상추 대신에 루꼴라를 넣은 것 역시 손님들을 기쁘게할 숨은 의도였던가보다. 그가 의도한 대로 난 그걸 즐겼고, 내가 의도한대로 내 감상에 그는 기뻐했다.

시간이 지나서 난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루꼴라는 그 후로도 가끔씩 다른 음식들에서 접할 수 있었고, 언젠가 씹어본 듯한 식감과 목구멍을 타고 코 바로 아래까지 풍기는 쌉쌀함을 여러번 되새겼지만 난 그 이름을 단지 샐러드나 피자 따위로 불렀지 재료로써 떠올린 적은 없다. 심지어 "루꼴라 피자" 를 메뉴판에서 보고도 반가워한다거나 그 때의 그 루꼴라였음을 연상했던 적도 없다. 루꼴라는 내게 그냥 좀 다른 종류의 기억으로 남게 된 거다. 레이블링, 인덱싱 해놓지 않아도 때가 되면 찾아지는 어렴풋한 뭔가로...

그의 갑짝스런 절교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식도 모른다. 당시 쓰고 있다던 책이 나왔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인데, 아마 앞으로도 그 책이 그의 마지막 소식이 될 것 같다. 내 삶에 피크닉이란 게 생긴다면 혹시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잖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그 유치함에 냉소를 보내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서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인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더 싫다. 오늘 문득 루꼴라라는 이름을 다시 알게 된 반가움이 어지러움처럼 느껴지듯 말이다.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9. 10. 4. 21:28
이 끄적임은 기형도의 시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 의 시상이 떠올랐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위작하여 덧붙인 것으로, 함부러 옮겨서 고인의 유작이 더럽혀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캄캄한 길을 가로지르다가

낯선 움직임을 피해 숨어든,

길 한복판에 솟은 나무 밖으로

그와의 성가신 숨바꼭질을 피해

움츠러든 가슴이 한 발짝 내딛었을 때

내 앞의 어둠에 그림자를 비춘

커다란 플래시



캄캄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마주친

낯선 움직임을 따라간

나의 두 눈이,

나무 뒤에 몸을 가린 반가운 조우를 뒤로 한 채

그를 사이에 두고, 불쑥

플래시를 동반한 앤진의 소음

예고된 존재의 소멸에, 질끈



그날

너무 캄캄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익숙한 장애물을 찾고 있던

나의 감각이, 딱딱한 소스라침 속에서

최초로 만난 事象, 불현듯

존재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



Posted by Lyle
A Day in the Life2009. 9. 28. 02:23
집에서부터 걸어다닐만한 곳에 있는 청계산을 오를 때 티셔츠와 반바지의 가벼운 차림이 좋다. 수건 하나 없이 옥녀봉이나 매봉까지 오르면 땀이 비오듯 하지만 바람에 말리면 그만이다. 물병 하나 없이 갈증에 목이 타더라도 몇 백 미터를 돌아서 들를 수 있었던 개나리 약수터를 그냥 지나쳤으므로 참을만하다는 거다. 수건이나 물을 들고 산에 오르면 땀 닦을 핑계로 발을 쉬게 하길 점점 더 할테고, 몇 모금씩 줄어드는 물병의 수위가 귀로를 생각나게 할 것만 같아 성가시다. 산에 흘려버릴 수도 있는 땀을 훔쳐낸 수건은 출발할 때보다 더 큰 짐이 될 꺼고, 갈증과 바꾼 빈 물병은 버리고 싶은 갈등이 될 수도 있다. 맨몸으로 오르는 청계산이 가장 시원하다.

산을 오르며 봐둔 쓰레기들은 내가 오른 길을 도로 내려감에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다. 처음 발견했던 건 내가 마지막으로 줍게 될 쓰레기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자릴 깔고 앉아 각자 싸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먹는 걸 보게 되면 옥녀봉에 가까워졌다고 알 수 있다. 옥녀봉에 흙을 깔고 앉아서 땀을 식힌다. 높은 곳에 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 '야호'의 메아리를 기대하듯 그들에게 나 여기 올랐다고 알리고 싶어진다. 버려진 비닐봉지 하나쯤은 그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제 산을 내려갈 차례다. 버려진 비닐봉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채우면서.

쓰레기를 줍다 보면 이걸 버린 사람이 이 길을 올랐을까 혹은 내려갔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내려가는 길에 춥파츕스 막대기를 발견하고 그 뒤에 추파츕스 껍대기를 만나게 되면 그걸 버린 사람은 이 길을 오른 사람이다. 캬라멜 껍질이 주기적으로 버려진 경우 내려갔는지 혹은 올라갔는지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버린 사람의 흔적이 낯설지 않아지면서 어색한 반가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사탕껍질 따위보다 훨씬 큰 쓰레기들은 등산로 옆 수풀에 버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왠만하면 길을 조금 벗어나서라도 그것들을 주워담는다. 다음에 여길 지날 때 같은 걸 다시 보게 된다면, 오늘보다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줍지 않고 지나쳤었다는 것보다 아무도 그걸 줍지 않았다는 게 말이다. 그건 불편한 외로움이다.

장갑과 모자를 착용하고 짊어진 배낭에 물병을 두개씩 꼽은 채 지팡이까지 지고 가는 대부분의 등산객들과 마주칠 때면, 가벼운 차림에 봉지 하나 들고 내려가면서 이따금 허리를 숙이는 내가 멋쩍어진다. 너무 간소한 복장이 그렇고, 남들이 하지 않는 행동 또한 그렇다. 그들은 등산객이고 나는 청소부인 것만 같다. 그래서 보고 지나치는 것 없이 싹 다 주워야할 것은 부담감도 인다. 혹시 그들이 내 민망함을 따라서 격어보기로 한다거나, 오늘 내가 그들 앞에서 지나친 걸 대신 줍지 않아도 상관 없다. 줍는 사람보다 버리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



산과 산이 아닌 곳의 경계는 어디일까. 매표소,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곳, 녹음이 사라지고 부침개나 두부전골 또는 막걸리 따위의 냄새가 맡아지는 곳부터? 엉덩이와 다리의 경계처럼 어떤 팬티를 입었느냐에 따라 달리 생각될 수 있는 문제. 오늘은, 내가 더이상 쓰레기를 줍지 않은 거기서부터 산이 아니었다. 산이 아닌 곳에 쓰레기는 훨씬 더 많다. 나는 왜 줍기를 멈췄을까. 산과 산이 아닌 곳의 경계는 내 가식의 경계에 있다. '야호' 하지도 않고 메아리를 기대하지도 않는, 산이 아닌 내 일상은 쓰레기로 넘쳐난다. 거기서 나는 버리는 사람일 뿐이다.

Posted by Lyle